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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작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무더운 여름날 오후 만원 「버스」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저급한 유행가 가락은 사람들의 지친 심신을 더욱더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만들 때가 많다. 달리는 열차 속의 방송음악 또한 모처럼 만에 시끄러운 도회 거리를 빠져 나온 여행자들의 오붓한 시간을 잡쳐놓기가 일쑤다.
「버스」속의 유행가나 열차간의 방송 음악은 애초에 승객 쪽에는 선택이 있을 수가 없다. 승객들은 방송 「스위치」를 독점하고 있는 운전사 양반이나 방송 책임자의 취향만을 따르고 복종해야한다.
그가 「뉴스」를 듣고 싶어하면 「뉴스」를 들어야 하고 유행가를 듣고 싶어하면 유행가를 함께 따라들어야 한다. 듣고 싶은 것을 골라 들을 수 없는 것은 사정이 그렇다 치더라도 그럼 듣기 싫은 것을 안 들을 수라도 있느냐 하면 그 조차도 물론 용납이 되지 않는다. 싫거나 좋거나 우리는 언제나 그 운전사 양반의 취향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면서 그것을 함께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난처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선택이 불가능하다면 거기서 아예 눈이라도 돌려버릴 수가 있다면 아직 다행일텐데 실상은 그런 외면조차도 전혀 용납이 되지 않은 그런 경우 말이다.
우리 일상 생활 주변에는 사실 그 「외면」이라는 가장 소극적인 선택조차도 힘든 일이 너무 많다.
우리는 만원 「버스」에 올라타서 상품 선전을 하거나 구걸 연설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피할 수가 없다. 새벽녘부터 이웃 교회당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성가 소리에 잠을 설친 사람들도 그 달콤한 아 잠의 손해 분만큼 함부로 믿는 사람들의 예배를 방해할 수가 없다. 방음 시설이 허술한 서민 「아파트의 「피아노」소리, 먼지 낀 길거리의 조화치장, 거짓과 협박 기가 완연한 각종 상품 광고 말, 누구나 조금씩은 편견과 혐오감을 지니고 있기 마련인 타지방 사람들의 당당한 사투리,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기분에 맞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외면이 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안 듣고 안볼 권리마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 이미 그 가장 소극적인 선택권마저 미리 포기를 해 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가령 「텔리비젼」만 해도 그렇다. 요즘은 이른바 8시대의 「프로그램」들이 너무 천편일률적이어서 구경할 재미가 없다는 불평들이 분분하다.
호부호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텔리비젼」을 아예 보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대개 「텔리비젼」을 집안에 들여놓고 있고, 또는 들여놓고 싶어한다. 싫으니까 안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싫어도 보겠다는, 싫어도 볼 수밖에 없다는 그 가장 소극적인 선거권의 포기 위에 수상기가 사들여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나무라지 말라. 그것이 문명이요. 문명 사회의 요술인 것을….)
결국은 이런 점이 좀더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안 듣고 안 볼 권리』조차도 포기된 처지에서 다중의 선택이 허용될 수 없는 일에는 그 다중을 위한 선택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쪽에 그가 혼자서 누리고 강요할 수 있는 자유 이외에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함께 가중되어져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다중이 없는 것은 아니며 말하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그 다중의 권리가 권리 아닐 수는 없다. 그야 물론 우리의 생활이나 삶의 어떤 부분을 선택권자들의 양식에만 의지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안 듣고 안볼 권리라도 누릴 수 있는 편이 낫고, 그런 소극적인 권리의 확보보다는 각자의 취미와 개성에 따른 화창한 선택의 세계가 더욱 더 바람직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지만.

<필자 소개>
▲39년 전남 장흥 출생 ▲65년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 졸업 ▲65년 사상계 신인 문학상 수상 「데뷔」▲66년 동인 문학상 수상 ▲76년 한국 문학 작가상 수상 ▲작품집 『별을 보여 드립니다』 『소문의 벽』 『조율사』 『당신들의 천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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