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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성처입은 용' 윤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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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지난주 가수 조영남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청담동 집에 놀러오란다. 무슨 자리냐고는 묻지 않고 달려간 것은 소설가 이윤기 등 늘 모이는 팀이겠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캐나다의 종교학자 오강남 박사가 와 있는지도 몰랐고,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손님일 수도 있다. 조영남은 이들과 모두 형님 아우 하는 사이인데, 이들 사이에 가슴 터놓고 하는 대화는 듣는 것만으로 배부른데, 막상 척 들어선 그의 집 풍경이 낯설다.

조영남, 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은 간혹 봤어도 노래 연습하는 것은 처음이다. 피아노 앞 악보는 윤이상의 '고풍 의상'. 한국미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담은 조지훈의 전아(典雅)한 시를 가곡으로 한 이 곡을 두고 조영남과 입씨름이 한창인 분은 마산MBC 윤건호 사장이다.

카피라이터 최윤희도 보인다. 아하, 싶었다. 지난 주 보도대로 조영남은 윤이상 교가 합창제(30일 경남 통영여객선 터미널)음악 감독을 맡았는데, 그 날 이벤트의 조율이구나 짐작했다.

"통영국제음악제 일환으로 거물 지휘자 주빈 메타가 이끄는 오케스트라가 오고 뻑적지근하지만, 지역 사람들은 왠지 허전한거야. 덜렁 멍석 깔아주는 역할 말고 뭐 없나 하다가 윤이상이 만든 교가를 생각했지."(윤건호)

"부산.마산.통영에 흩어진 30개 초.중교 교가로 갈라쇼를 한다는 아이디어가 확 땡기더라구. 머리 희끗희끗한 왕년의 밴드부원들까지 무대에 세워 진짜 지역축제 한판을 벌이자구."(조영남)

지금부터 책 얘기다. 기자야 영문도 모른 채 끼었지만,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윤이상이란 인물과 그 속살을 담은 책 관련 이야기로 대화가 흘렀다.

두 사람은 윤이상 관련 책을 애써 찾았지만, 그의 부인 이수자의 '내 남편 윤이상 1,2'(창작과 비평사, 1998)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20년 전 나왔었다는 소설가 루이제 린저(윤이상과 절친했다)의 '상처입은 용(龍)'은 도통 구해 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 그것이 우리 출판의 궁핍함이요, 우리 사회의 썰렁함이다. 백남준과 함께 현대 한국이 낳은 인물 윤이상이 이 정도라니…. '내 남편 윤이상'은 치밀한 기록물임에 틀림없으나, 윤이상 정도라면 훨씬 다양한 저술이 깔려 있어야 정상이다.

'상처입은 용'의 경우 윤이상이 도가(道家)철학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문화유산을 현대음악 안에 어떻게 도입하려 했나를 잘 서술했으나, 알고 보면 '상처 투성이'다. 1980년대 당시 당국의 눈을 의식해 엄청 솎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이벤트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책만큼 좋은 게 없다. 듣자니 방정환재단의 경우 남북한 어린이 교류사업 전개에 앞서 재단 사업의 우선 과제를 소파 방정환의 평전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점 귀감이 될 만한데, 윤이상이야말로 분절된 현대사를 반영하는 거물이 아니던가.

'상처입은 용' 재출간을 포함해 윤이상 책의 등장을 고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글로벌한 인물 윤이상을 놓고 그중 로컬한 방식의 멋진 페스티벌을 실험하는 남쪽 항도(港都) 교가 축제의 성황을 기대한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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