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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자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인형의 집」을 뛰쳐나간「노라」의 행동과 그 후에 그녀가 겪었으리라 짐작되는 인생역정은 여권운동의 의의와 방향에 많은 시사를 주는 것이었다.
여성이 자신에게 있어 어느 의미에서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남편과 아이들과 가정을 버린 대가로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녀는 과연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참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존중을 받았으며, 그 이후 후회 없는 생을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인가. 그녀의 행동이 백 번 옳았다 해도 가정을 지키면서 모권이나 자주성을 주장할 수는 없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과연 자신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남편과 어린 자식들 가슴에 못을 박고, 한 가정을 파탄의 비극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 정녕 잘한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고는 여권신장과 여성해방운동은 불가능한 것인가.
「노라」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그 뒤 여권운동의 전개방법과「우먼·파워」가 끼친 영향 및 그 공과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고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5면 기사 참조),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여성의 지위와 발언권이 크게 향상·강화된 사실만은 의문의 여지조차 없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개화파의 박영효가 1888년 1윌13일에 올린 이른바「개화상소」에서 부녀에 대한 학대금지·교육 시 여의 균등시행·과부재가 인-허 및 남자의 취첩 금령 등을 주장한바 있었던 것이지만, 갑신 개혁의 실패로 그 당 장엔 결실을 보진 못했으나, 그 후 여성의 권리와 지위는 점진적으로 개선돼 왔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딸들을 가르치기 위해『소경3년·귀머거리 3년·벙어리3년』이 되라고 강조했던 송우암의『계녀서』가 말해 주는 바처럼 유교적 가치규범이 모든 사회제도의 지도이념이던 전통적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장전이 삼종지도였음은 의심할 바 없다. 효와 정절과 인종과 헌신이 여자의 으뜸가는 미덕이요, 부덕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간과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은 출가외인의 불문율 하에서도 한국 여성은 제 성을 그대로 지녔던 일이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 성을 따르는 구미는 물론 동양의 일본 풍속과는 달리 오직 중국과 한국여성만은 시가 성을 쓰지 않았다. 뿐더러 중국여성들의 치욕적인 전 족도 한국여성에겐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가부장제도와 봉건적·유교적 윤리관의 침 잔·붕괴로 우리나라여성은 그 숙명적 속박의 굴레에서 해방됐으며, 근대화·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여성의 법적·사회적 지위는 괄목할 만큼 향상되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과 각 분야에서의 활약과 기여도 현저한 바가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여권운동의 떠들썩한 구호나 여걸형 유한여성들의 거센 치맛바람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여성의 여성다운 자리』를 가정과 직장과 그리고 사회활동에서 어떻게 확립·정착시키느냐에 있다고 오늘날 가정과 직장·사회 각 분야에서 지배·복종의 종전의 남녀관계는 극복되고 상호 보완하는 횡적 평등관계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
다만「트랙터」나 경운기운전·갱내작업 등과 임신·출산 등 여성이 그 신체적·생리적 여건 때문에 남성보다도 더 어려움을 겪어야 할 분야를 제외하고는 어떤 편견에 의한 차별이나 불평등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일은 육아나 가사도 훌륭한 직분이라는 것과 여권신장이라 하여 여성의 여성다움을 버리고 남성화한 사고나 생활을 하려는 것은 여성의 타락일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의 혼란과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남성이 갖지 못한 부드러운 마음씨와 몰아 적인 헌신과 자기희생 등 여성특유의 기질과 기능을 살리는 것이 가장 강력한 여성의 힘이며 보람된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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