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개원 60년...소록도 국립 나병원|일제 때 일황후 하사금으로 세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국립나병원(원장 신정직·전남 고흥군 진양읍 소록도)이 17일로 개원60년을 맞았다. 국립 나병원은 1916년 소록도 자예 의원으로 출발, 그동안 명칭만도 6차례나 바뀌었다.
그동안 병원을 거쳐간 환자만도 2만 여명. 이중엔 시인 한하운씨도 이곳에 머무르면서 『항토 길』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교혜 의원은 일본 대정 시대 황후의 하사금으로 세워졌다. 그래서 장소선정도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소록도를 택하게 됐고 지금까지 병원 앞뜰에 남아있는 값진 정원수 역시 일본 황실에서 옮겨다 심은 것들. 병원 원장은 일본의 원로급 학자나 의사로 충원했다. 원장이 「리무진」승용차로 서울총독부로 나들이를 할 때는 각도지사와 고급관리들이 도열, 깍듯이 응대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소록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이면에는 한일합방 후 열강의 비난이 고조되자『일본이 나환자에게까지도 인도주의 정신으로 잘해주고 있다』는 「쇼·윈도」적 선전을 하기 위한 저의가 깔려 있었다는 것.
이러한 배경에서 설립된 자혜의원은 처음 1백 명을 수용하는 작은 규모였으나 30년대는 6천여 명을 수용할 만큼 확장됐다. 2대원장「하나이」(화정)씨는 환자들이 송덕비를 세워 줄 정도로 환자를 극진히 돌보았지만 30년대에 부임했던 주방원장은 원한에 찬 환자의 칼에 찔려 비명에 갔다.「하나이」원장이 부임할 당시만 해도 나병은 천형(천형)의 병으로 전해져 있었다. 「하나이」원장은 나병이 천형의 병이 아닌 병원균으로 전염되는 병임을 입증하려고 연구에 심혈을 기울었다. 부인을 일본에 보내고 자신은 여성나환자와 동거생활을 했다. 그래도 자신이 나병에 전염되지 않자 나환자의 피를 뽑아 자기 몸에 넣었다. 이 결과 수혈한지 6개월 후 발병했다. 「하나이」원장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의학계에 발표하고 자살했다는 것. 환자들이 세운 송덕비는 지금도 남아있다.
주방원장은 병원확장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환자들을 혹사, 자신의 동상까지 만들었다. 이에 격분한 환자들 중 동경유학 중 이곳에 수용돼 와있던 김모씨의 칼에 찔려 주방원장은 자신이 세운 자신의 동상제막식전에서 비명에 갔다.
국립병원에는 현재 3천3백46명의 환자가 있다. 건물도 박정희 대통령과 고 육영수 여사의 하사금으로 신축, 현대화되었다.
수용환자는 하루 쌀 2백89g과 잡곡 3백45g,부식으로는 육류·어류·조미료를 배급받고 있다. 채소 류는 40평씩 분할 받은 밭에서 자급하고 있다.
신부1명과 목사2명, 미국·「오스트리아」에서 파견된 간호원5명도 환자를 돌보고 있다. 그러나 이 병원에 입원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