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샤」만에 자리잡은 「반다르아바스」항에 「버스」로 이르렀을 때는 어두운 저녁이었다. 여관이란 여관은 모두 만원이어서 「이슬람」교 사원에서 신세를 지려고 찾아가는데 경찰서가 보인다.
차라리 경찰서에서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별로 달가와 하지 않는다.
마침 직위가 높아 보이는 경관이 나오기에 다시 사정을 했다. 역시 거절하며 어느 여관에 가보라고 하면서 경관을 딸려 보낸다.
바로 아까 들렀을 때 만원이라고 하던 곳인데 경관이 와서 권유하니까 「패스포트」를 내라고 하며 방 값은 아주 싸지만 선금을 받는다. 안내한 방은 다름 아닌 내정인데 대추·야자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방마다 합숙이며 2층「베란다」도 만원이지만 이 내정에 놓여 있는 70개의 고물 침대에도 손님이 차 있으며 「콘크리트」바닥에서도 그대로 자리를 깔고 재우는지 침구가 마련되어 있다.
이 내정에서 자려는 사람은 2백여명이니 떠들썩하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있어 국제적인 무슨 모임 같기도 하다. 「이슬람」교 예배 시간에는 쥐죽은듯이 조용하지만 금방 또 수선거리니 편히 쉴 수 없을 것 같아 차라리 사문에 나가 혼자 쉬는 것이 더 편안할 것 같았다. 이때 키가 훤칠한 「유럽」청년이 자루를 메고 내 곁으로 온다. 그는 「프랑스」사람인데 여관은 만원이어서 나처럼 경찰의 호의로 이 노천 합숙소에 왔다고 한다.
외국 여행자를 서로 만나니 반가 와서 우리는 금방 친해졌으며 「룩색」을 보관시키고는 시장에 가서 값 싼 음식으로 늦저녁을 들고는 그와 여행담을 나누며 대추·야자나무 아래에 놓인 쇠 침대를 바싹대고 누웠다. 만일을 생각하여 구두는 벗어 침대 밑에 매달아 놓고 「카메라·백」은 애인처럼 꼭 껴안고 자는 것을 있지 않았다. 이런 나의 모습이 만삭이 된 남장 여인으로 생각되는지 힐끔힐끔 바라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아침에 깨 보니 밤에는 기온이 내려서 춥던지 「프랑스」청년과 나는 서로 꼭 맞대고 있었다.
내가 쉰 숙소 앞은 바로 「페르샤」만 바다인데 눈앞에 「호름」섬이 보였다.
이 섬은 지금은 농사를 짓는 한산한 곳이지만 중세기에는 동서무역이 활발했으며 「포르투갈」이 세계 해양을 지배할 때 요새를 만들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섬이다. 그러나 나에게 유독 이 섬이 무한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은 저 유명한 「마르코·폴로」가 중국에서 「베네치아」로 돌아갈 때 선편으로 들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마르크·폴로」의 옛 발자취를 찾아보려고 이 「호름」섬에 가기 위하여 「프랑스」청년과 함께 역사 지도를 갖고 부둣가로 나갔다.
그러나 그 섬과 연락하는 나룻배도 없을 뿐 아니라 타고 갈 배도 없어 할 수없이 부둣가에 우두커니 서서 그 「호름」섬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적으로는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건만 공간적으로는 바로 저 섬이 「마르코·폴로」가 들렀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신비스럽게만 느껴진다.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좋아한 나는 그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기어이 그와 같은 여행자가 되려고 했는데 이번 다섯번째 세계 여행길에서 그가 다닌 길을 더듬으며 옛날을 상상하노라니 섬 위에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르코·폴로」의 위대성을 찬양하며 외람되게도 나는 그전 「칠레」의 어떤 언론인에게서 「마르코·폴로 2세」라는 칭호를 받고 큰 자랑을 지니고 지금까지 여행을 계속해 왔지만 정작 「마르코·폴로」가 다닌 길을 찾아 그 옛 모습을 만나게 되니 나에게 붙여 준 「마르코·폴로 2세」란 이름이 나에게는 너무나 과한 듯 하며 혹 그의 이름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다.
이같이 옛사람과 영적으로 말을 주고받는 것은 비단 이 「이란」땅에서 뿐은 아니며 많은 곳을 쏘다니며 세계의 위인이나 영웅들이 다닌 길을 더듬으며 환상적인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내가 여행에 미친 몸이어서 그런지 여행가 「마르코·폴로」와의 이 공간적인 해후는 더욱 감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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