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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형제는 둘, 아내는 하나 …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사이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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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저지대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548쪽, 1만4800원

삶에도 우기가 있다. 맹렬한 기세로 들이치며 모든 것을 쓸어갈 듯 뒤흔드는. 시간이 지나고 햇살이 비치면 우기의 자취는 조금씩 옅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마음 속 어딘가에는 우기가 끝난 뒤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고인 저지대 같은 자리가 있다. 때때로 고인 과거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곪고 상한 채 현재를 잠식한다.

 책은 인도계 미국 작가로 1999년 출간한 첫 소설집 『축복받은 집』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줌파 라히리(47)의 신작 장편.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소설은 흘러가지 않은 채 마음의 저지대에 고여 있던 과거가 순간순간 현재로 흘러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두 형제와 그들의 아내였던 한 여자의 이야기이며,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이야기이고, 그들이 각자의 기억과 상처를 극복하는 이야기다.

 인도 캘커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수바시와 우다얀은 연년생 형제. 마치 쌍둥이를 연상케 하듯 친밀하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형인 수바시가 차분하고 현실적이라면, 동생인 우다얀은 열정적이며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했던 신생국 인도의 현실은 형제의 삶을 판이하게 바꿔 놓는다.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수바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사회주의자인 우다얀은 인도의 좌익운동에 가담한 채 부모의 허락없이 친구의 여동생 가우리와 결혼한다. 1967년 캘커타 폭동에 관련돼 경찰에 쫓기던 우다얀은 결국 체포돼 총살당하고 가우리는 우다얀의 아이를 가진 채 과부가 된다.

 동생의 죽음을 알고 인도에 돌아온 수바시는 부모가 가우리를 내치려는 것을 눈치채고는, 가우리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다. 가우리와 가정을 꾸린 수바시는 실제로는 우다얀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벨라를 자신의 딸로 키우며, 가우리가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일상은 이어지고, 삶은 계속되지만 우다얀은 수바시와 가우리, 벨라 그리고 부모에게 상처로 고인 채 곪아간다. 수바시와 가우리의 결혼 생활이 삐걱대는 것도, 결국 가출을 택한 가우리 때문에 벨라가 상처받은 것도, 수바시의 엄마가 죽는 날까지 넋을 놓은 채 살아가는 것도 모두 우다얀이 남긴 기억 때문이다.

 70여 년간 인도와 미국을 오가며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의 삶과 각자의 사연은 겹겹이 두껍게 덧칠한 유화를 닮았다. 그렇지만 작가 특유의 정갈하며 담백한, 오히려 잔잔하기까지 한 문체로 인해 작품의 분위기는 파스텔톤에 가깝다.

 깊은 호흡으로 한껏 음미하며 문장을 읽어 내려가게 하는 작가의 솜씨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책의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겠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며 ‘오랫동안 그대로 고여 있을’ 듯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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