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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화랑혼|육사창설 30돌을 뒤돌아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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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참되게 자라자, 배워서 이기자, 나라를 빛내자』-. 창설30주년을 맞는 육사생도들은 오늘도 이같은 교훈에 따라 인격과 지식을 연마하며 내일을위한 조국방패로서의 훈련을 거듭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탄생과 성장, 온갖 역경을 거의 함께 나누며 오늘 국내최고 「아카데미」의 수준으로 자라난 육사는 그동안 8천여명에 달하는 조국의 간성을 길러냈다.
불암산기슭 30만평에 자리한 육사는 1천1백개의 각종 실험실, 장서10만여권의 도서관, 국내유일의 전사박물관등 시설을 갖추었고 이학·공학박사등 우수교수진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생도들이 4년간 기숙하는 내무반과 푸른잔디가 곱게 펼쳐진 화랑연병장, 종합체육관, 2천5백석의 대강당등은 육사가 자랑하는 최고수준의 도장이다.
육사는 46년5월1일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초대교장이형근)로 창설됐다.
대부분 일제때 군 경력을 가진 1기생 80명은 일본식 군복을 입고 미국및 일본식 혼합 교육을 받아 교육 45일만에 소위로 임관됐었다. 같은해 9월25일 학교명칭은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돼 현재의 박정희대통령을 포함, 2백60명의 2기생을 입교시켜 그해12월14 이중 1백90명을 임관시켰다.
그러나 M1및 「카빈」소총, 0.5「인치」 기관총등 기본화기를 다루게된것은 3, 4기때부터.
이후 생도수와 교육기간도 차차 길어져 48년9월5일에야 현재의 육군사관학교로 명명되면서 1천8백명의 8기생들이임관,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졸업식에 참석, 이들의 임관을 축하했었다. 「생도1기」로 불리는 10기생들은 50년 6·25동란이 벌어져 7월14일의졸업 예정일을 못채우고 포천부근등 8차례의 전투에 참가, 전투중 대전에서 임관되기도. 전쟁으로 51년10월30일 호해에서 재창설됐다가 54년6월21일 현재의 태능으로복교,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8천명의 장교를 배출해왔다.
초창기에는 사상이 정립되지 못한 생도들이 많아 상당수가 퇴교등 희생을 치렀다.
내무반 규율도 원시적이어서 내무반 안에서 상급자를 만날 때마다 큰북을 때리며 신고를 해 매우 「소란스런 내무반」생활이 한동안 개속됐다. 「유니폼」에서도 졸업후 칼을 차기 위해 허리와 어깨에 「벨트」를 두르고 「재키트」에 일본식 하의, 장화, 푸른 띠를두른 모자를 써 촌티가 가득했었다.
나이 차도 많아 2기생때는 최하 20세부터 최고 36세가 함께 공부했다. 군수 행정도 미흡해 행군 훈련때는 운반중 식사가 쉬어 생도들이 끼니를 굶은 때도 있었고 흉년이 들어 옥수수밥·고구마 서너개로 하루끼니를 때워 변비로 고생하는 생도가 많았으며 배고파 식사를 훔쳐 먹다 벌받은 경우도 있었다.
겨울졸업식때에도 여름옷을 껴입고 식장에나와 임관식을 치르는 때도있었다.
1백%를 국비로 교육받는 사관생도들은 4년동안 일반대학처럼 총1백60학점을 이수해야한다.
이들은 1∼2학년때엔 교양과목, 3∼4학년때엔 군사·관리·전기·병기·기계·군공과정등 전공과목에 치중하여 유도·태권도·무도중 1개는 꼬 유단자가 돼야하며 개인의 특기개발을 위해 과학·음악·체육등 과외활동도 하게된다.
금연·금주·금혼등 삼금을 도덕율로 정한 생도들은 자치근무제도, 명예재도등 엄격한 규율밑에서 생활하고 있다.
매년5월 화랑천분수가에서는 쌍쌍「파티」, 가을엔 대학축전인 화랑제가 화려하게 열려 가족·친지등 일반인에게도 공개된다. <조동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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