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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으로 떠나면서 「하노이」에 남은 듯 위장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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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다음은 월남 적화 1주년을 맞아 「뉴요크·타임스」지가 입수한 월맹군 총 참모장 「반·티엔·둥」의 75년 대공세의 전말기다. 월맹 쪽에서 나온 일방적인 것이기는 하나 월남 적화의 비극을 가져온 이 전투의 과정을 상술한 첫 문서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74년 7월부터 10월까지 월맹군 참모부는 바쁘게 돌아갔다. 중앙당 군사위 정치위는 대남 전략계획을 마련키 위해 회의를 열었다. 「레·두안」 당 제1서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곧 미군이 이미 월남에서 철수했으므로 다시 개입할 수 없을 것이고 어떤 형태로 개입하든 간에 「사이공」정부를 붕괴로부터 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75년 봄으로 계획된 대규모 공세에 주 전선을 중부 고원지대로 설정한 참모부의 작전계획을 만장일치로 수락했다. 이 작전계획에 따르면 75년 중에 광범한 지역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76년에 가서 실시될 본격적인 공세와 월남 내 봉기를 위한 여건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월남 정부군이 중부 고원지대의 공수사단을 「다낭」으로 이동시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정보는 중부고원지대를 겨냥한 월맹군의 작전준비를 정부군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그래서 이 회의에서는 중부고원의 요충에 대한 공세를 앞당겨 실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정부군은 월맹의 계획을 오판했다. 즉 정부군 지도자들은 만약 월맹군이 중부고원을 공격한다면 북쪽에서부터 공격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부고원의 남쪽지역인 「달라크」성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두고 있었다.
정부군은 75년 월맹군이 주요 성도를 공격할 만큼 강력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며 비록 월맹군이 성도를 점령하더라도 정부군의 반격 앞에 이를 수비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월맹군이 공세를 펼 때까지 「반메투오트」에는 강력한 부대를 배치하지 않았으며 수비는 엉성했다.
「반메투오트」를 공격하려는 결정이 내려지자 나는 전선으로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나를 따라 서부고원으로 갈 간부단이 조직되었다. 이 간부단의 암호명칭은 A-75였다.
이 작전의 중요성 때문에 나의 행동은 엄격한 비밀리에 유지되었고 월남정부군의 정보를 분산시키기 위한 만반의 조치가 취해졌다.
계획에 따라 내가 출발한 후 신문들은 마치 내가 아직 「하노이」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나의 활동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나의 「볼가·세단」차는 매일 상오 7시와 하오 2시에 내 집에서 사령부로 갔다가 낮 12시와 하오 5시에는 집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하오 늦게는 군인들이 내 집 뜰에서 배구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오의 근무시간이 끝난 뒤에 군인들과 배구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개인비서는 출발하기 전날 저녁에 큰 병이 걸린 것처럼 가장하여 「앰블런스」가 그를 병원으로 옮기고 그는 그 병원에서 출발하기로 되어있었다.
이미 내린 결정에 따라서 이 작전에 관한 모든 통신·정보·연락 및 토론에서 「보·구엔·지압」국방상은 「치엔」으로, 그리고 나는 「투안」으로 불리게되었다. 월맹군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74년 12월 9일과 10일에 「티우」월남 대통령은 육군장성들과 월맹군의 활동을 평가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었다. 그들의 결론은- 월맹군은 74년보다는 대규모 공세를 취할 수는 있으나 68년의 구정 공세 때만큼 대규모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75년의 북부지역 공격의 목적은 「파리」평화협정을 이행하도록 월남에 압력을 넣는데 성공할 수 있는 정도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월맹군의 의도를 이렇게 잘못 평가했기 때문에 월남은 전략적인 병력배치를 하지 않았고 서부고원을 포함한 제2전략지역을 강화하지 않았다.
나는 중부고원에 도착한 후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정부군은 월맹군부대가 여기까지 진출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월맹군의 목표에 대해서는 기습부대를 배치, 정부군을 고립시키고 그들이 모르게 결정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유지하여 병력손실을 극소화하면서 신속하게 승리를 획득하고자하는 것이었다. 최전방 지휘부의 야전보고는 3월 5일 수색활동 도중 월맹군의 포병장교들이 정부군과 조우했다고 전했다. 월맹군 쪽 병사가 부상하여 일기를 가진 채 포로로 잡혔다. 나는 곰곰 생각했다. 『우리가 「반메투오트」를 나흘 안에 공격할 터인데 정부군은 그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정부군이 우리의 목적을 잘못판단하고 있다면야 별일 없겠지만 만약 이와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난다면 정부군들은 정세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3월 10일 상오 2시 「반메투오트」에 대한 공격은 기습부대가 「호아빈」과 비행장에 대해 공격하면서 개시됐다.
포격이 시작되자마자 시내의 불빛이 모조리 사라졌다. 시내비행장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기습 부대가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제 정부군의 1개 군단병력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중부지방에서 급히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철수를 하는 것인가? 누가 철수명령을 내렸는가? 「반메투오트」에서 월맹군이 가한 타격이 치명적이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의문은 항상 작전 결정을 내리는데 무거운 압박을 가했다. 【워싱턴=김영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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