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국판 '잃어버린 20년' 악몽을 피하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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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요즘 한국개발원(KDI)은 매우 의미 있는 조사를 하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정밀 진단해 반면교사로 삼기 위한 작업이다. 일본은 거품 붕괴 이후 1992~2000년 9차례에 걸쳐 124조 엔의 엄청난 재정을 투입했으나 경기부양에 실패했다. KDI에 따르면 일본은 공공투자의 53%를 도로·항만·공항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반면 한계생산성이 높은 정보기술(IT)과 철도에 들어간 공공투자 비중은 10%에 그쳤다. 일본의 도로·항만·공항의 한계생산성은 IT·철도의 5분의 1이다.

 일본이 정치논리와 지역이기주의에 따라 공공투자를 왜곡한 결과 경기침체는 이어지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도 끌어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이미 한국의 지방공항들은 텅 비었고, 국토면적 대비 고속도로 길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5위, 국도는 7위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예전 타성에 젖어 한계생산성이 낮은 사회간접자본(SOC)에 재정투자를 쏟아붓고 있다.

 세대 간의 생산성과 소비성향도 정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처럼 무차별적 경기부양책 대신 ‘맞춤형’ 정책을 만들려면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3040세대는 생산성과 소비성향이 가장 높은 세대다. 그럼에도 이들은 2008년 이후 실질임금이 정체상태인 데다 가계대출과 전셋값 상승, 사교육비에 짓눌려 있다. 서비스업 규제완화와 ‘내수 중심의 경제성장’은 물론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이들 세대가 지갑을 열지 않는 이상 공허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도 큰 방향 전환을 고민해야 할 때다. 무엇보다 분야별로 한계생산성을 엄밀히 따져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이미 SOC 투자보다 IT 네트워크나 연구개발(R&D) 등에 대한 투자가 훨씬 생산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 났다. 또한 그동안 우리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교육과 기술 등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가 자본의 회임(懷姙) 기간은 길지만 더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활력을 되찾기 위해 정책 초점도 3040세대에 맞출 필요가 있다. 공공임대주택과 민영임대주택 공급을 늘려 이들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공교육 투자 확대로 교육비 부담을 완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이들의 소비성향이 되살아나고 우리 사회의 허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이제 우리 사회의 재원을 어느 쪽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키를 쥐고 있는 게 정치권이란 점이다. 김준경 KDI원장은 세계 경제권을 승자와 패자로 구분하면서 “탄탄한 성장세의 독일과 눈에 띄는 회복세의 미국은 정치권이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한 게 공통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패자인 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 등은 정치 혼란이 경제위기를 부채질했다. 우리가 속절없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뒤따라갈 수는 없다. 정치권과 정부, 우리 모두가 합심해 크게 방향을 틀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