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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여우」로멜을 꺾은 명장「몽고메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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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알라멩」전투의 지장이요, 2차 대전의 영웅이며 북대서양동맹 산파역의 한사람인 「버나드·몽고메리」원수는 생애를 통해 『노병은 사라진다』는 격언마저 뒤집어 놓은 불세출의 위인이었다.
북「아프리카」전투에서『사막의 여우』로 알려진 독일의 「로멜」원수를 격멸시켜 더욱 유명해진 이 파란만장의 노병은 58년 영국에서 은퇴한 뒤에도 칼 대신 「펜」을 들고 종횡무진의 저술을 계속하여 그의 얘기가 신문표제에서 빠질 날이 거의 없었다.
「몽고메리」의 특징 가운데 한가지는 언제든지 사병들과 함께 서슴지 않고 최전방 전투에 참가하는 기질을 들 수 있다. 44년 원수에 승진된 후에도 사병들과 함께 어려운 최전방전투에 참가했던 「몽고메리」원수는 이 때문에 사병들로부터 「몬티」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작은 키에 볼품없는 얼굴을 한 그는 전쟁터에서도 헐렁한 군복에 낡은 검은 「베레」모 차림으로 부대를 이끌어 나갔으나 솔직 담백한 태도와「스파르타」식의 검소한 생활은 부하군인들과 국민의 존경을 받아왔다.
성미가 급하고 직설적인 말로 논쟁을 잘하는 지휘관인 그는 전쟁 중에는 물론 전쟁 후에도 대부분 동료들이나 「아이젠하워」장군과 같은 연합군 사령관들과 곧잘 다투었다.
60년 중공을 방문, 모택동을 만나고 돌아온 그는 『중공에야말로 내가 함께「정글」에더라도 따라 갈만한 인물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고 68년 당시「드골」프랑스 대통령이 영국의 「유럽」공동시장가입을 거부하자 이에 맞장구를 치는가하면 「워터게이트」사건 훨씬 이전부터 「리처드·닉슨」전 미대통령비판자이기도 했다. 그는 「닉슨」을『부적격자』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2차 대전 후 「아이젠하워」장군을 몹시 비판했는데 한때 자신의 상관이었던 「아이크」를 「노르망디」작전을 이해 못한「멍텅구리」로 단정했다. 42년 「아프리카」북부「알라멩」전투에서 사막의 여우라는 「로멜」원수가 이끄는 「나치」독일군을 격퇴시키고 2차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 전환점을 마련한 그는 군사의 천재, 전장의 「쇼맨」이라는 별명이 붙어 왔으며 「웰링턴」공작 이래 가장 훌륭한 영국 현대군인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1차 대전에 참가한 젊은 「몽고메리」는 치명상을 포함한 수차의 부상을 입어 최고 무공훈장을 탔고 2차 대전 발발시에 소장으로 승진, 「덩커크」전투에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용감한 후퇴를 단행함으로써 『병사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전쟁이 끝난 뒤 「몽고메리」원수는 영국 군 총참모장이 되었으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유럽」연합군 부사령관으로 7년간 근무했다.
그는 58년 영국군 창립이래 최대의 기록인 50년간의 현역생활을 끝낸 뒤 최근 몇 년간을 「햄프셔」주 작은 마을인「이싱턴」에서 장미와 진달래를 가꾸며 살아왔다.
1887년11월17일 주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27년 인도주재 영국관리의 딸인 40세의 과부와 결혼했다. 부인은 열렬한 평화주의자여서 이 부부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였으나 1937년 부인이 죽자 그는 비통해 마지않았으며 슬하에 1남 「데이비드」가 있다. <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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