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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있는 아침 ] -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나, 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괘종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 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 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 내 삶이 내 맘대로 안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황지우(1952~ ),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흔적을 지워야 한다 도둑은. 기억조차 지워야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것이 도둑의 운명. 중고품이 되는 것도 숙명. 내 맘대로 안되니 나는 나의 도둑일까. 아니면 거울아, 거울아! 누구냐. 매일 밤 내 운명에 손을 대는 그 자가.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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