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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의 시시각각

웬 이정희 … 새누리당의 오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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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연초 박원순 서울시장 쪽 사람에게 물었다. 새누리당 후보로 누가 가장 껄끄러운가. 정답은 ‘김황식’이었다.

 그러나 선거 때 한 달은 평시의 1년이다.

 두 달 동안 정몽준 의원이 먼저 치고 나가면서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박 시장 쪽 사람에게 “아직도 김황식이 더 어려우냐”고 물었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꺼낸 얘기가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였다.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은 당시 후기리그 막판 두 경기를 롯데에 져줬다. OB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OB는 야신(野神)이라는 김성근 감독이 이끌고 있었다. 결국 롯데가 우승해 삼성과 맞붙었다. ‘야신’ 김성근을 피하려다 ‘완투의 신’ 최동원을 만났다. 롯데에 최동원이 있다는 걸 몰랐을 리 없지만 삼성은 그걸 몰랐다. 한국시리즈 혼자 4승이란 불멸의 전설을 남길 최동원의 ‘운명’을. 오만의 대가가 그리 클 줄을.

 박 시장 측근의 결론은 “누가 롯데인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였다. 하지만 내심은 짐작이 가능하다. 어떻든 도전자들끼리 박 터지는 것, 시너지 대신 상처를 안고 기진맥진한 채 한 명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지 않을까. 지난 대선 때 문재인-안철수 후보단일화를 기다리던 새누리당도 그랬다.

 한국 정치에선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어도 상대방이 제풀에 쓰러지는 경우가 자주 있으니 요행을 바라는 것도 하나의 수다.

 실제로 새누리당 경선이 파투(破鬪) 날 뻔했다. 경선을 셋(김황식-정몽준-이혜훈)이 하느냐 둘(정-김)이 하느냐. 이 문제로 다투다 심판(당 공천위원회)이 3자 대결을 결정하자 김황식 전 총리가 경선 일정을 보이콧하고 사흘간 잠수를 탔다. 좋은 게 다 좋은 거란 법은 세상에 없다. 보이콧도 수단이다. 하지만 비상수단이어야 한다. 심판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2자 대결과 3자 대결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든 어쨌든 그런 문제로 칩거한 건 김 전 총리가 보여온 그간의 많은 장점과도 배치된다.

 김 전 총리는 경선 일정을 재개하면서 “선발 후보들의 언행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김 전 총리 역시 못지않았다. 그는 이혜훈 최고위원을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에 비유했다.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려고 나왔다”던 이 대표다. 이 최고위원을 ‘김황식 저격수’ 정도로 의심하는 것 같다. 이름만 들어도 새누리당 당원들이 자다가 벌떡 일어난다는 그와 비교당했으니 ‘오리지널 친박’이라 자부하는 이 최고위원이 가만 있을 리 없다. ‘박심(朴心)이나 파는 분’ ‘시장이 되면 안 될 분’ ‘대통령 당선에 한 게 없는 분’. 김 전 총리를 겨냥해 공세의 빗장을 완전히 풀었다. 정 의원은 “고위 공직을 지내신 분이 정말 잘해주시기 바란다”고 한마디 했다. 표현이 우악스럽진 않아도 비수가 담겼다.

 이대로라면 어떤 패자가 경기 후 승자를 위해 뛰어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느낄까.

아름다운 경선엔 조건이 있다. 승자 한 명에 순교자가 반드시 한 명 있어야 한다. 명분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지더라도 감동을 안겨주는 정치적 순교자에겐 다음 기회가 보상으로 주어진다.

 지금은 순교할 사람이 없어 보인다. 판을 키워도 너무 키웠다. 총리까지 지낸 거물급 인사와 이번이 대권의 마지막 찬스인 7선 의원이 붙었다. 누가 ‘다음’을 기약하며 기꺼이 순교할 수 있다는 자세로 임할까.

 어쨌든 그건 두 사람 쪽 입장일 뿐. 판이 크다는 것이 ‘박심’ 논란으로 상대를 마마보이로 만들고, 이정희란 이름까지 데려다 새누리당에서 고생시키는 걸 합리화해주진 않는다.

 갑자기 페어플레이하긴 어려울지 몰라도 최소한 시늉은 해야 한다. 새누리당은 정몽준·김황식, 둘 중 한 명이 올라오기만 하면 과정은 어때도 이길 줄로 착각하고 있다. 과정을 무시하는 오만함에 사로잡히는 순간 악몽은 시작이다. 84년 OB를 피하느라 최동원을 고른 삼성의 비극도 ‘져주기’라는 오만에서 출발했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