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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원서 손든 뇌종양 환자, 마지막에 그가 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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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제생병원 김한규 교수가 두개저 수술을 받은 백종건씨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백씨는 모든 병원서 포기했던 뇌종양 환자다. [김수정 기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 모든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우리는 이들을 ‘명의(名醫)’라고 부른다.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의미는 조금씩 퇴조하고 있다. 새로운 약과 첨단 의료기기가 외과수술의 영역을 대체하는 사례가 늘어서다. 하지만 여전히 명의는 필요하며, 또 존재한다. 의사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뇌종양 분야다. 관동대 의대 분당제생병원 신경외과 김한규 교수는 뇌종양 환자가 치료 마지막 단계에서 만나는 의사다.

지난 20일 분당제생병원 수술실. 뇌 수술이 한창이다. 환자는 한의학도 장성택(22)씨. 그는 시야가 흐려지는 증상과 복시가 생겨 대학병원을 찾았다가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종양의 위치가 문제였다. 뇌 바깥쪽이 아닌 깊숙한 숨골 부위에 있었다. 환자가 먼저 찾은 국내 최고의 대학병원에선 예후가 좋지 않을 거라며 수술을 포기했다. 장씨는 옮긴 병원인 국립암센터의 권유로 김 교수를 만났다. 결국 12시간 수술 끝에 장씨는 부작용 없이 회복 중이다.

 백종건(30)씨의 사례는 더 극적이다. 뒷목이 욱신거리고 팔·다리가 저리는 증상으로 동네 병원을 찾았다. 백씨는 목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증상이 심해져 옮긴 큰 병원에서는 목디스크가 아닌 뇌종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대로 두면 2년 내 사망한다고 했다.

당시 그는 결혼 1년여밖에 안 된 신혼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동네 병원 추천으로 국내 뇌종양 수술의 전문가로 알려진 교수를 만났지만 부정적이었다. 시기가 너무 늦었고, 수술을 하더라도 생존만 가능한 수준일 것이라고 했다. 백씨는 ‘주변 정리를 하고 오라’는 말도 들었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에 수소문하다 김 교수를 알게 됐다. 백씨는 현재 김 교수에게 수술을 받은 뒤 건강하게 새 삶을 찾았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두개저 수술’

다른 병원에서는 포기했던 뇌종양 환자들은 어떻게 삶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비밀은 두개저 수술이다. 일반적으로 뇌종양 수술은 두개골과 뇌막을 열고 종양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온갖 신경이 모여 있는 뇌를 수술한다는 그 자체로 난도가 높고 위험을 전제로 한다.

 뇌종양 수술도 난이도가 나뉜다. 이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종양의 위치다. 종양이 뇌의 중심부에서 멀리 있을수록 수술이 수월한 편이다. 메스의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종양이 뇌 깊숙이 있으면 난도는 높아진다. 일반적인 수술 방식으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 설사 수술을 하더라도 뇌를 젖히고 종양 부위에 접근해야 하므로 그 과정에서 뇌 조직이 손상돼 부작용이 생기기 쉽다.

 두개저 수술은 깊숙이 위치한 종양 부위에 최단 거리로 접근하는 수술법이다. 뇌를 떠받치는 두개골 바닥뼈인 두개저에서 수술이 이뤄져 붙여진 이름이다.

 수술이 더 간단할 것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다. 온갖 신경과 혈관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시신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경이 뇌 밑 숨골과 척추로 둘러싸인 척수를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신경 총 12개 중 8개가 이곳 두개저를 지나간다. 심장에서 뇌로 가는 동맥 역시 두개저를 지난다. 가장 중요한 신경·혈관이 이곳에 모여 있는 셈이다.

두개저 수술은 바로 그물처럼 얽혀 있는 신경과 혈관을 살리면서 해야 하는 정밀한 수술이다. 그만큼 위험도가 높다. 자칫 신경을 잘못 건드리면 환자는 눈이 멀거나 마비가 온다. 그래서 뇌 해부학적 구조를 완벽히 파악한 의사만이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뇌 깊숙이 자리한 뇌종양 수술의 경우 두개저 수술을 못하는 의사는 포기한다”며 “다른 방법으로 수술을 할 수 있지만 합병증이 몇 배 증가한다”고 말했다.

수술 시간 길면 꼬박 하루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김 교수가 두개저 수술 권위자로 거듭난 과정이 그렇다. 현재 두개저 수술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의사는 김 교수를 포함해 국내에 단 2명뿐이다.

 두개저는 사실 김 교수의 레지던트 시절인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해서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라고 불렸다. 두개저 수술은 1980년대 중반 태동했다.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신경외과 의사의 관심이 상당히 높았다. 뇌종양 치료에 있어 획기적인 수술이었기 때문.

1994년 국내에도 두개저외과학회가 창립됐다. 두개저 관련 학술행사는 직접 두개저 수술을 하거나 배우려는 의사들로 늘 북적일 정도였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 수는 점차 줄었다. 수술이 워낙 고난도인 데다 수술 시간이 길어 고되기 때문이었다. 두개저 수술은 짧게는 6시간에서 길게는 꼬박 하루가 걸린다. 그래서 의료계에서 두개저 수술이 3D 분야로 통한다.

 김 교수는 “1990년대 초반에는 두개저 학술미팅이라고 하면 의사들이 아주 많이 참여했다”면서 “이제는 사람들이 없다. 힘드니까 다들 중간에 그만뒀다”고 말했다. 결국 현재 두개저 수술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의사는 국내에 2명밖에 없는 셈이다. 의료계에서조차 그를 명의라고 부르는 이유다.

글=류장훈 기자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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