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와인 vs 과한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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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호 23면

살면서 가장 허탈한 기분이 드는 경우가 자신도 모르게 ‘독박’을 썼을 때가 아닐까. 와인의 경우 가격과 품질에서 독박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품질이 떨어지는데도 이름이 알려진 와인이라 단지 이름 값을 더 지불해야 하는 경우나 와인에 취해 자신이 시킨 와인의 가격을 모르고 사인하는 등등이다. 어쨌거나 졸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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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유명 와인 바에 일본인들이 게스트로 참석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초대한 쪽에서 와인을 하나 추천해 보라고 게스트에게 부탁했던 것 같다. 일본인 중 한 명이 와인 리스트를 보고 샤토 마고 82년 산을 가리키자 초대자는 바로 주문을 했다. 그리고 모두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 와인을 마셨다.

문제는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초대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지만 청구서에 나온 단위는 몇 백만원이었다. 알고 보니 와인 리스트에 써 있었던 가격은 정확했는데 와인 한 병이 몇 백만원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래서 건성으로 보다가 0을 하나 덜 본 것이었다.

사실 82년산 마고는 최고의 와인에 최고의 빈티지를 자랑해 구하기도 어렵고 그 와인 바에도 단 한 병밖에 남아 있지 않은 최고급 와인이었다. 아마도 그분은 그 시간 이후로 와인 이름보다 가격표를 보는 데 더 주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버스는 이미 지나갔으니….

비슷한 맥락으로 몇 년 전 와인 바에서 알게 된 회장님 한 분이 있다. 좋은 와인을 주로 마시고 직원들에게도 나누어 주시기 때문에 특별히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분을 와인 바에서 뵙기가 무척 힘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들르시던 분을 몇 달째 바에서 뵐 수 없었고, 그 기간이 거의 1년이 됐다.

얼마 전 우연히 바에서 뵙고 반가워서 안부를 묻다가 그동안 두문불출한 이유를 알게 됐다. 이야기는 이랬다. 어느 날 저녁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고 와인도 드신 상태에서 늦은 시간 와인 바에 들르셨다. 기분이 좋아 한잔 더 하고 계셨는데 마침 따님이 전화해서 친구들과 함께 와인 바로 오라고 했단다. 딸과 친구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와인을 많이 드셨지만 이들을 위한 좋은 와인을 추천해 달라고 직원에게 부탁했다. 평소 그분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직원을 믿고 부탁했던 것이었다.

이후의 시간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없었고 시간이 늦어 집으로 오셨다. 다음날 아침 주머니 속에서 나온 영수증을 보게 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백만 단위였다. 바 직원이 계산을 잘못한 결과라 생각하고 확인해 보니 마지막에 추천을 부탁한 와인이 100만원이 넘는 와인이었다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놀란 회장님은 직원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고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1년이 지나서야 다시 오게 됐지만 아무래도 그전보다는 내키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날 밤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분이 딸과 친구들에게 좋은 와인을 추천하라고 하니 직원은 평소 드시는 것보다 좋은 것을 추천했는데 ‘좋은 것’을 넘어 ‘과한 것’을 추천했던 것 같다. 회장님 입장에서는 독박을 쓴 기분이었을 것이다. 결국 손해 본 것은 와인 바였다. 좋은 손님을 1년 넘게 놓친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 번 틀어진 손님과의 관계를 원상 복구하는 데는 열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느 회장님이 말하셨던가. 좋은 경영은 암탉이 매일 알을 잘 낳게 하는 것이지 닭 자체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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