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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프랑코 독재 청산한 협상의 달인 좌우 아우르며 민주화 초석 다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8호 12면

역사의 가정(假定)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지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뒤 군부의 야욕을 달래면서 사회 각계각층의 이해를 조정해내는 현명하고 노련한 정치인이 있었다면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80년 광주의 비극도, 이후 12년의 군부통치도 없었을지 모른다. 민주화는 그만큼 빨라졌을 수도 있다.

아돌포 수아레스 전 스페인 총리

로이터=뉴시스

스페인 역대 총리 중 가장 존경 받아
스페인에는 그런 리더가 있었다. 아돌포 수아레스(사진) 전 총리다. 박 전 대통령과 자주 비견되는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 총통 사망 직후의 어지러운 정국을 슬기롭게 수습하며 민주화의 길을 튼 인물이다. 스페인 여론조사에선 늘 가장 존경받는 전직 총리로 뽑혀왔다.

그가 지난 23일 타계했다. 81세. 직접적인 사인은 폐렴이지만 10년 이상 알츠하이머 등 여러 병에 시달려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최근에는 자신이 총리였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스페인 정부는 국장을 선포했다. 장례는 31일 치러진다.

고인은 76년 7월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에 의해 총리로 지명됐다. 프랑코 체제가 붕괴된 직후 임명됐던 아리아스 나바로(1908∼89) 총리가 우유부단한 태도로 군부와 구 정치권에 끌려다니자 카를로스 1세는 당시 대중적 인기가 있던 43세의 정치인 수아레스를 그 자리에 앉혔다.

당시 스페인 정국은 80년 ‘서울의 봄’과 비슷했다. 쿠데타와 내전으로 집권한 군 출신 프랑코의 36년 통치가 막을 내렸어도 군부는 여전히 호시탐탐 정권을 노렸고, 극우부터 급진까지 각 정치 세력이 발호하기 시작했다. 노동계의 요구도 분출했다. 프랑코 시절 무력으로 통제됐던 바스크 지역 분리 운동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수아레스는 민주화를 위해 크게 세 가지 일을 했다. 첫째는 군부 힘빼기였다. 그는 군 내부의 온건파를 하나둘씩 ‘포섭’한 뒤 조용히 요직에 앉혔다. 그 사이 카를로스 1세는 군부 강경파의 반발을 달래는 역할을 했다. 둘째는 대사면이었다. 총리 취임 직후 400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동시에 그들을 잡아들였던 비밀경찰을 해체했다. 셋째는 정치적 통합이다. 그는 공산당까지 합법화시켰다. 그리고 모든 정치 세력과 단체 또는 일대일로 정치 개혁 과제를 논의했다. 그 과정에서 새 헌법이 만들어졌고, 새 스페인의 정치·사회의 지향점을 망라한 ‘몬클로아협약’을 이뤄냈다. 총리 관저 주소지의 이름이 붙은 이 협약에는 노동자의 임금 인상폭과 복지 예산의 틀까지 포함한 국가 미래 청사진이 담겼다.

의회 난입 쿠데타군 앞에서도 당당
수아레스는 프랑코 시절 국영방송국 사장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의 총리 취임에 좌파가 반발했지만 군부와 우파의 저항을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가치의 다원성을 믿는 유능한 협상가’로 표현했다. 고인은 77년 스페인 내전(1936∼39) 이후 처음 치러진 직접 선거를 거쳐 총리직을 이어갔다. 81년 그가 이끈 중도우파 세력의 인기가 폭락하자 사퇴했다.

그가 총리직에서 용퇴한 지 한 달 뒤 스페인 군부는 의회를 장악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의회에 난입한 군인들은 의원들에게 바닥에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수아레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의석을 지킨 세 명의 의원 중 하나였다. 이 쿠데타는 카를로스 1세의 반대 성명과 시민들의 시위로 하루 만에 실패했다. 고인은 훗날 “총리까지 지낸 내가 비겁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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