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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억 퍼부으려는 한식 체험관, 전문가 평가는 “탁상공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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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호 14면

서울의 한 한식당에 말끔하게 차려진 음식상(왼쪽)과 약과·대추·잣 등을 이용해 만든 한국식 디저트. 맛도 좋고 가짓수도 풍성한 게 한식이지만 이를 안목 없이 세계화하려던 정부의 사업에 지난해 ‘예산 낭비’라는 낙인이 찍혔다. 건수 올리기식의 전시성 행사가 대부분인 데다 부처 간 협력 체계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포토]

9900㎡(3000평) 땅 매입에 117억원, 설계비 20억원, 공사비 250억원 ….

시행착오 성찰 없이 흘러가는 ‘한식 세계화’

지난 1월 김기현 의원 등 새누리당 의원 11명과 새정치민주연합의 김춘진 의원이 발의한 ‘한식 진흥에 관한 법률안’에 포함된 건설 사업이다. 해당 시설은 ‘한식종합체험시설’. 법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한다면 2015년부터 3년간 총 399억4600만원의 세금이 쓰인다. 김 의원에 따르면 이 법안은 다음 달 국회에 상정된다.

이 법안의 기초가 된 농림수산식품부(현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재단이 2012년에 낸 보고서를 보면 한식종합체험시설 방문객들은 김치를 담그고, 만두를 빚어보고, 한과를 만들어 보게 된다. 김치의 변천사 등 한식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관도 들어선다. 2000석 규모의 뷔페도 생긴다. 단체 관광객이 다양한 한식을 시식해볼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한식비즈니스 종합지원센터도 만들어 한식 세계화의 구심점(Hub)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도 담겨 있다.

이 프로젝트는 2년 전 농식품부가 한식재단과 함께 ‘한식 랜드마크 설립 기본계획’을 설계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식 세계화 사업의 성과에 대한 비판론이 확산되던 때라 농식품부는 기획재정부에 예산 지원을 요청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김 의원이 자원해 이를 떠맡았다. 김 의원은 “한옥·한복 지원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한식 지원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류 시리즈’를 완성하겠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라고 말했다.

관광객 원하는 건 생활에서 맛보는 한식
2012년의 원래 보고서에는 예산으로 총 283억원이 책정됐다. 김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에는 여기에 부지 매입비 117억원을 더했다. 농식품부와 한식재단의 당초 계획에는 부지는 기증받는 것으로 돼 있었다. 이 재단은 지난 11일 홈페이지에 ‘한식 홍보관 건립을 위한 독지가를 모십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재단 관계자는 “관광객들의 접근성 면에서 한식 체험시설은 수도권에 세워져야 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117억원으로 수도권에서 3000평의 땅을 사기는 매우 힘들다. 따라서 법안 속의 입지 계획과 한식재단의 구상은 거리가 있다.

이 법안에는 운영 자금에 대한 계획은 들어 있지 않다. 일단 건립되면 내부 점포 임대료나 입장료, 체험 실습료 등으로 충당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이에 따라 관광업계에서는 “단체 관광객 유치를 위해 관광 업체에 협조를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음식 전문가들은 ‘한식종합체험시설’의 필요성에 회의적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52)씨는 “관광객들은 이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해하고 어울려보고 싶어한다. 우리가 일본 식당에서 라멘을 먹고 돌아와 한국 땅에서 라멘집을 찾듯이 여행에서의 기억과 어우러져야 그 나라 음식도 퍼져나가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체험시설 설립은 기억의 자극을 중요시하는 여행객의 심리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탁상공론식 정책”이라고 덧붙였다.

건축물부터 짓고 보는 전형적인 ‘전시행정’이라는 비판도 있다. 정부 주도 한식 행사의 진행을 맡았던 A업체 관계자는 “내실을 키워야 할 시점에 큰돈을 들여가며 굳이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한식 사업에 대한 주도권을 쥐려는 욕심과 뭔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조급증이 빚은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한 한식업계 관계자는 “수억원씩 들여 떡볶이 페스티벌도 하고 각종 전시회도 해왔지만 호응은 제대로 얻지도 못하고 사진 한 장 찍고 끝났다. 정부 주도의 한식 사업은 신뢰를 너무 잃었다”고 말했다.

한식 체험시설은 이미 꽤 있다. 인천 월미공원에는 사설기관이 운영하는 ‘M 전통음식문화연구원’이, 서울 경운동에는 김치제조업체 J사가 만든 체험관이 있다. 지방에도 지역 음식을 소개하는 비슷한 유의 시설이 여럿 있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게 그다지 인기 있는 공간은 아니다. 최근에는 초등학생들이 김치 만들기를 배우는 교외 수업의 공간으로 자주 활용된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한식 세계화 사업은 크게 축소됐다. ‘영부인 프로젝트’라는 별명을 얻으며 전방위적으로 지원받던 때와는 다르다. 농식품부·문화체육관광부·외교부 등 5개 부처에 걸쳐 범정부적으로 진행되던 일이 농식품부 단독의 사업으로 바뀌었다. 실무는 대부분 한식재단이 맡고 있다.

감사원, 지난해 총체적 부실 진단
예산 규모도 쪼그라들었다. 2012년 213억원이던 관련 예산이 지난해에는 188억원으로, 올해엔 124억원으로 깎였다. 지난해 6월 감사원이 사업 효과 미진과 부당 예산 집행을 지적하며 ‘총체적 부실’ 진단을 내린 것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 감사원은 2009년부터 3년간 한식 세계화 지원 예산 931억원 가운데 227억원이 원래의 용도대로 쓰이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정권의 ‘의지’와 정부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현재의 사업은 해외에서의 한식 홍보사업에 치중해 있다. 예산의 상당 부분은 이미 만들진 한식재단의 해외 지부 운영비로 쓰인다. 이는 ‘한식 세계화 사업 현지화’로 포장된다. 감사원 지적과 정책 기조의 변화 뒤에 따라야 할 ‘목표’와 ‘전략’에 대한 수정 작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정권 교체 뒤 사업 자체가 된서리를 맞게 되면서 정부 내부에 한식 세계화 사업에 대한 언급 자체를 터부시하는 경향도 생겨났다”고 말했다. 음식 평론가 황광해(47)씨는 “한식은 무엇인가, 세계화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시행착오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흘러가는 분위기가 문제다. 한식종합체험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어설픈 발상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K-푸드로 간다” 소문 … 부처 간 불화 조짐도
현 정부에서 ‘한식’은 버리고 ‘K-푸드’를 밀고 있다는 말도 있다. 한식 홍보 행사를 맡아온 B업체 관계자는 “정부에선 지금까지의 한식 이미지 만들기가 사실상 실패했다고 보는 것 같다. 전부 폐기하고 K-푸드로 간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고 했다. K-푸드는 홍삼·김·만두·소주 등 외국에서 인기 있는 한국산 식품을 일컫는다. 부처 간의 불협화음이 표출되는 조짐도 있다. 유럽 지역의 한 대사관 관계자는 “농식품부는 한식의 식재료를 팔겠다는 생각이 앞서지만 통상·검역 등에서 번번이 가로막히고, 외교부는 ‘K 브랜드’ 만들기에만 욕심을 내고 있다. 그 와중에 해외의 문화원을 관장하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는 전 정부 때와는 달리 음식 문화 알리기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현재의 상황을 평가했다. 우왕좌왕의 난맥상이라는 의미다.

김 의원 등이 발의한 ‘한식 진흥에 관한 법률안’에는 한식위원회 설립도 포함돼 있다. 최대 25명의 위원은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농어업인, 농어촌 전문가가 맡는다. 운영비는 ‘농어업인 삶의질 향상위원회’에서 충당한다는 게 법안상의 계획이다. 농어업 관련 예산을 한식 세계화 사업에 쓰고, 정부에 전체 사업을 관장하는 기구를 둔다는 발상이다. 한식재단 관계자는 “다시 정부가 주도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한식 세계화 사업에 대한 이미지만 악화된다”고 주장했다.

이 법안에는 한식의 식품영양학적 품질 특성을 조사·연구하기 위한 비용으로 70억7000만원이 책정돼 있다. 한식이 영양적 측면에서 얼마나 우수한 음식인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대해 프랑스 특급호텔 조르주 생크의 조리사 출신인 윤화영(39) M 레스토랑 대표는 “아프리카 중부의 어느 나라 음식이 영양학적으로 뛰어나다고 해서 외국인들이 갑자기 많이 먹지는 않을 것 같다. 프랑스 정부가 그런 식의 접근을 했다는 얘기도 못 들어봤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현재까지의 한식 세계화 사업 진행 과정에 나타난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를 분석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단계”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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