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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페이터」저·이덕형 역-르네상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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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구인들에게 「르네상스」는 문명의 현재 진행형이다. 그 근원에 대한 탐구는 오래 계속되었다. 「프랑스」계의 사학자들은 그것을 「프랑스」 중심이었던 중세의 연장으로 보려 했고, 「부르카르트」를 중심으로한 「게르만」계 학자들은 그것을 「라틴」 풍토에 대한 배반적 요소의 충격으로 파악하려 했다. 「월터·페이더」의 「르네상스」 (1873)는 이 점에 있어 영국적인 중용이 유감없이 발휘된 글이다. 이 책이 『두편의 초기 「프랑스」단편』에서 출발하여 『「빈켈만」 연구』로 끝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되찾으려한 「페이터」의 노력은 어느 한 시대의 노력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르네상스」의 거장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우선 낭비 없는 삶이다. 「에피큐리언」 적인 이 관점은 후에 「오스카·와일드」 등에 세기말의 분위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페이터」의 일부분만을 강조한데서 생긴 결과다. 「페이터」는 자유로운 인간 정신과 그 정신의 필연적인 소산인 아름다움의 탐구에 몰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탐구의 뒤에는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이 뒷받침하고 있다. 대리석 조각을 사랑하다가 「카라라」 채석장까지 사랑하게 된 「미켈란젤로」의 경우처럼 「페이터」가 애정 때문에 때로 너무 시적으로 되는 일은 이 글의 흠이라기 보다는 장점이 되고 있다.
『르네상스』는 정교한 문체를 지닌 글이다. 단어 몇개로 생의 전부를 표현하려고 시도되기도 하고 한 귀절 한 귀절이 최대로 즐겨져야 이해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기도 하다. 「폴로베르」의 「일물 일어설」에 비교되기도 하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묘한 「리듬」을 도입하기도 하고, 정확함보다는 기이함을 위해 형용사가 사용되기도 한다. 고 이양하 선생이 「페이터」의 다른 글을 번역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번역에 저항하는 『르네상스』를 완역한 일은 혹시 다소의 흠이 있더라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역자는 연세대 영문학교수.
황동규 <영문학·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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