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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에 끌려다니긴 싫다 … 글쓰며 진격하다 죽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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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복거일의 신작 장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은 아주 하찮은 일들에까지, 비장함의 빛깔을 살짝 입힌다”는. 간암 투병 중인 작가 자신의 말처럼 전해져 아릿했다. [사진 문학동네]

간암 투병 소식이 알려진 27일, 소설가 복거일(68)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가족 외에 가까운 지인조차 그의 투병 사실을 몰랐던 데다, 작가 스스로 ‘어떤 뜻에선 나의 자서전’이라고 밝힌 신작 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문학동네·사진)에서 암 투병 사실을 간접적으로 밝힌 터라 빗발치는 전화를 피하려는 것으로 짐작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춘천 한림대에서 3시간짜리 강연을 하고 있었다. 암이라는 죽음의 그림자가 느닷없이 그의 앞에 멈춰섰지만, 암에 끌려다니는 대신 일상을 택한 것이다.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소설 주인공 현이립이 간암 말기임에도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글쓰기에 매진하겠다고 한 것과 닮았다. 말하자면 현이립은 복거일의 분신이자, 대변인인 셈이다. 그래서 복거일로 빙의한 현이립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답변은 모두 소설 속에서 가져왔다.

 - 몸 상태는.

 “2년 반 전 암 진단을 받고서 한 번도 병원에 안 갔으니 얼마나 진행됐는지 모른다.”

 -항암 치료를 거부했다.

 “치료받기엔 좀 늦은 것 같다. 남은 날이 얼마나 될진 모르지만, 글 쓰는 데 쓸란다. 한번 입원하면, 다시 책을 쓰긴 어려울 거다. 암 치료받기 시작한 작가들 결국 소설다운 소설 못 쓰고서…. 작가가 작품을 쓰지 못한다면, 사는 게 얼마나 가치가 있나. 그리고 꼭 써야 할 작품이 있다.”

 그가 꼭 써야 할 작품은 과학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다. 1991년 3권까지 낸 뒤 독자에게 속편을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한 것이 무거운 짐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암과 싸우면서 3권의 속편을 마무리해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다. 올 가을쯤 출간될 예정이다.

 - 죽음을 의식하면서 달라진 게 있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작은 친절에 더욱 마음을 쓰게 됐다. 산책길에 만나는 한해살이풀에도 새삼 눈길이 간다.”

 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겐 거의 모든 일들이 한가로운 걱정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지식인이자 작가이기에 남들이 하지 않는 ‘한가로운 걱정’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한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길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의 모습 속에서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고 대기업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의 세태를 안타까워한다.

 -자신을 지도제작자에 비유했다.

 “돛배를 타고 너르고 위험한 바다 너머로 진출한 뱃사람에게 얻어들은 토막 지식으로 먼 대륙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해서 지도의 빈칸들을 조금씩 메워가는 허름한 지도제작자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체계화해 한 장의 지도에 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매달려 왔다.”

 - 스스로 고립치라고 했다.

 “나는 거의 생리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난 지식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이 사회에서 통념에서 벗어난 주장을 가장 많이 편 사람이라는 점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선뜻 동의할 것이다.” 자유시장 경제론자로 그가 주장한 법대 무용론이나 영어 공용화 등이 다양한 논란을 불러온 걸 의식한 말인 듯했다.

 -언제까지 글을 쓸 수 있을까.

 “이제는 소설을 더 쓸 기력도 없다. 단숨에 써낼 수 있는 글들만 쓸 수밖에 없다. 그래도 기력이 다할 때까지 쓰긴 쓸 것이다. 그것이 삶의 본질에 맞게 삶을 마감하는 길이니. 용기가 아니라면 오기로 버티면서, 깃발 휘날리며 진격하다 죽을 것이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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