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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거품이 잔뜩 낀 한국 정치인의 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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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광고가 여러분을 ‘가르치려 든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지. 내 경우엔 종종 있다. 제품과 별 상관없는 진부한 문구 때문에 짜증날 때가 있다. ‘그냥 해버려(Just Do It)?’ 대체 뭘 하란 말인가. ‘절대 탐험을 멈추지 말라(Never Stop Exploring)’는 훌륭한 충고인지는 모르지만 왜 그 비싼 재킷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광고가 의도하는 것은 좋은 느낌을 불러일으킨 다음, 그 느낌을 제품이나 브랜드와 연결하는 것이다. 애매하지만 감정을 자극하는 말이 ‘이 재킷 사세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도 사실이다. 슬프지만 그렇다.

 광고 때문에 재킷을 사건 안 사건,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문제는 광고 홍보 전략을 정치에 응용하는 경우다.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게시판은 ‘희망’ ‘소통’같이 온갖 것을 약속하는 포스터로 뒤덮여 있다. ‘원더풀’하지만 뜻이 애매한 말들이다. 시·구·동…. 심지어는 나라를 누가 운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재킷 구매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럼에도 정치를 파는 사람들은 아주 비슷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이 칼럼을 쓰기로 작정한 이유는 특별히 어처구니없는 사례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선거구에 후보로 나온 정치인은 ‘서울의 꿈과 희망! 국민과 함께!’를 내세웠다. 이보다 더 진부하고 알맹이는 없는 슬로건이 있을까. 선거 포스터는 ‘꿈’이나 ‘희망’이 구체적으로 뭔지에 대해선 침묵한다. ‘국민과 함께’는 무슨 뜻일까. 정책 결정에 유권자를 정말로 참여시킨다는 말일까. 여러분 의견을 묻겠다는 말일까. 이런 허언(虛言)은 유권자에게 긍정적인 기분을 유발할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포스터 때문에 자극받은 나는 약간의 조사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48명의 여야 모든 정당의 국회의원 웹사이트를 방문했다. 그들은 이름이 ‘기역’으로 시작된다는 점 외에는 공통분모가 없었다. 웹사이트에 나오는 슬로건, 큰 제목, 작은 제목을 살펴봤다. 사실 전체 단어 수가 많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솔직하지 못한 말들, 정치인의 정책과 생각을 유권자가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은 단어들을 세봤다.

 3분의 1에 해당하는 16명의 의원이 ‘희망’을 내세웠다. 11명은 ‘소통’, 9명은 ‘행복’을 표방했다. 또 다른 9명은 ‘국민’ 혹은 ‘여러분과 함께’를 약속했다. 구체적인 정책이나 목표를 웹에 올려놓은 의원은 극소수였다. 내가 살펴본 웹사이트들은 시종일관 해당 정치인에 대해 막연히 좋은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같은 단어와 문구가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광고계와는 달리 정치 구호의 세계에서는 창의성이나 다양성마저도 없었다. 별 효과가 없다면 정치 광고는 다른 길을 모색했으리라. ‘희망’이나 ‘꿈’ ‘여러분과 함께’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으로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의원 몇몇은 학벌로 홈페이지 첫머리를 장식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대 출신들이 그랬다. 나는 정치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읽고 싶다. 그런데 역시 득표에 도움이 안 된다면 학벌이 그토록 잘 보이게 배치하지 않았으리라. ‘서울대 카드’를 구사하는 의원 중 한 명은 자신을 ‘○○시(市)의 힘’이라고 묘사했다. 트위터에는 ‘젊은 보수의 아이콘’이라고 나와 있다.

 한 웹사이트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두드러졌다. 그 국회의원은 공허한 언어 대신, 홈페이지 잘 보이는 곳에 면담 신청 링크를 걸어놨다. 그가 선거구 주민들과 얼마나 자주 만나는지 나는 물론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고방식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유권자가 의원들과 대면 미팅을 하는 게 흔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가능하냐’고 물어볼 때마다 친구들은 대부분 ‘전혀 그럴 가능성 없다’고 대답한다.

 유권자와 만나 대화하는 게 진짜로 ‘국민과 함께’하는 것이다. ‘소통’과 ‘희망’과 온갖 놀라운 것을 약속하는 번쩍거리는 대형 포스터를 다음 번에 마주쳤을 때, 사무실에 연락해 포스터의 주인공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소통’과 ‘희망’이 뭘 의미하는지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기 위해서 말이다.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