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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발견서 공표까지 |영일에의 기대…비밀에 싸였던 43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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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처음 석유가 포항 시추공에서 나온 날짜는 12월3일. 지하 1천4백75m에서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12월6일 청와대에서 열린 중동 관계자 회의석상에서 시꺼먼 원유를 참석자들에게 공개했다.
회의를 주재한 박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그것 한번 가져와 보지』라고 지시, 김실장은 시꺼먼 항아리 하나를 박대통령 앞에 갖다 놓았다.
참석자들은 난데없이 시커먼 항아리가 하나 들어오자 『여수·부산 밀수범 수사에서 압수한 아편단지를 보여주나 보다』고 생각했다는 것.
『우리나라 육지에서 석유가 나왔다』고 말을 꺼낸 박대통령은 『포항에서 나온 것인데 구경들 해보라』고 항아리를 내보였다.

<박대통령 삼국사기 인용>
참석자들은 너무도 놀라운 소식에 어리벙벙해서 서로 앞으로 나가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기도 했다.
한 참석자는 『믿어지지 않아 항아리에 손을 넣어 직접 만져보니 석유 냄새가 확 코를 찌르며 끈적끈적한 것이 시꺼멓게 손에 묻어 나오더라』고 했다.
박대통령이 접시 하나를 가져오게 하여 시커먼 액체를 조금 부어 직접 성냥불을 그어 붙이자 『금시 불이 붙어 검은 연기를 내며 탔다』는 것.
박대통령은 『지하 1천4백75m에서 나왔다』고 밝히고『그러나 매장량이 얼마나 되며 경제성이 얼마나 있는지가 문제』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삼국사기에도 토함산 동쪽 1백여리에서 온 땅덩어리가 1백여일간 불바다가 되었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역사적 사실을 인용.
그러나 경제관계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들로 구성된 참석자들의 입은 밀봉이 돼 비밀이 유지됐다.
이틀 뒤인 8일 청와대 저녁식사에 초청 받았던 고 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이사들에게도 이 사실이 공개됐다.
박대통령은 곽상훈 박순천 홍종인 박종화 신명순씨 등 10여명의 이사들과 저녁식사 전 「칵테일」을 들며 『우리나라에서도 석유가 나왔습니다』고 했다.
박대통령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들을 짓고 있는 이사들에게 다시 한 뼘 크기의 약병에 담긴 검은 액체를 가져오게 하여 『냄새를 맡아 보라』고 돌린 후 탁자에 놓여있는 재떨이에 붓고 불을 붙여 보여주었다.
박대통령은 『그 매장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어 국민 앞에 책임 있는 말을 할 수 없다』면서『정부로서 아직 발표단계는 아니지만 소문이 퍼지는 거야 어떻게 막겠느냐』고 했다.
며칠 뒤 차지철 경호실장은 경호관계자 훈시에서 『대통령 각하께서는 석유가 나온 것을 확인하고 기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전하고 『이 기쁨은 비단 우리의 기쁨만이 아니라 모두의 기쁨』이라며 『우선은 우리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자』고 했다.

<월탄이 신춘시서 비쳐>
박대통령 영애 근혜양도 이 사실을 뒷받침하듯 지난해 12월 14일 국내 여기자들과 TBC-TV 특별 「인터뷰」에서 새해의 소망으로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왔으면…』하고 석유분출 희망을 살짝 비쳤었다.
박종화씨는 중앙일보 1월1일자 특집에 실은 시 『비룡재천』에서 『청룡이 조화를 부린다. 방방곡곡에 윤이 흐르라고 석유를 뿜는다』고 읊었다.
석유가 쏟아져 나오는 듯한 흥분에 청와대 비서실이 술렁이자 박대통령은 오찬석상에서『우리나라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온다면 소비성 조장이나 나눠먹기식 복지가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를 보다 더 발전시키는데 알뜰하게 사용하겠다』고 했다는 후문.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따르면 석유발견은 17년간이나 영일 지구에 석유가 있다는 확신 아래 시추를 거듭한 정성엽씨(구명 정우진)가 김 전총리의 백씨인 김종락씨를 찾아 지원을 호소한데서 시작됐다.
정씨의 호소를 들은 김씨는 김 전총리(당시엔 총리)를 찾아와 『틈을 내어 정씨의 얘기를 한번 들어 보라』고 권유했다.
평소 일본의 「니이가다」유전과 우리나라의 태백산맥 및 중공의 대경유전이 같은 석유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김 전총리는 백씨의 얘기를 듣고는 곧 정씨를 불러 2시간 동안 소상한 설명을 들은 후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 박정희 대통령에게 『예산 지원을 하여 포항 부근을 좀더 깊이 파보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건의를 받은 박대통령은 선선히 『지구 저쪽인 「아르헨티나」가 나올 때까지라도 한번 파보라』고 재가,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추를 했다.
국민회의 대의원 안보 보고회에 참석키 위해 지난해 12월16일 부산에 내려간 김 전총리는 수행기자들에게 이런 경위를 설명하면서 『대통령께서 내 보고를 들으신 후「석유도 없다는데 돈만 쓸 일을 뭣 때문에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더라도 석유발견은 영원히 없을 뻔했다』면서 『모두다 국운』이라고 했다.
김 전총리는 박대통령의 재가를 얻은 후 우리나라에 있는 관계 전문가를 몽땅 동원, 「팀」을 만들어 현지 답사를 시키고 한편으로는 남혜우 부총리에게 지시, 19억원이란 경비를 조달토록 했다. 전문가「팀」이 잡은 지점 3곳을 파 들어간 결과 첫째 구멍에선「메탄·개스」와 1백20도의 온수만 솟아올랐고 두 번째 구멍을 1천4백75m 파들어 갔을 때 마침내 석유가 솟았다.
그 때가 12월3일-.

<여야 의원은 10일에 알아>
석유가 나왔다는 전화를 받고 김 전총리는 처음엔 자기 귀를 의심하며 『그런 것이 어떻게 나와』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거듭 석유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서울로 한「드럼」올려 보내라』고 지시한 후 곧바로 박대통령에게 보고.
이날부터 박대통령이나 김 전총리는 흥분으로 매일 밤잠을 설쳤다는 얘기.
김 전총리는 포항 부근 외에도 우리나라 내륙 서너 곳에 석유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석유가 나온 포항 부근도 1천5백m정도밖에 못 팠기 때문에 정확한 매장량 파악이 안된다는 것인데 김 전총리는 미국이나 중동석유도 지하3천∼4천m에서 나온다면서 본격적인 유전 굴착장비를 외국에 발주했다고 밝혔다.
이 장비가 우리나라에 오기까지 약8개월이 걸리고 그 장비를 조립, 본격적 작업으로 매장량을 알 수 있으려면 그로부터 다시 4개월이 걸려 정확한 내용은 금년 l2월초에나 밝혀지리라고 그 때 김 전총리는 설명했다.
석유발견 사실이 여야의원들에게 알려진 것은 12월10일.
김종필 전총리는 국회 재무위원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한 자리에서 석유얘기를 꺼냈다. 『영일에서 석유가 나왔다. 1천5백m 지하에서 채굴됐는데 질이 좋으며 지금 기계를 발주해 놓고 있다』-.
식사전에 「칵테일」을 들면서 야당 재무위원들이 새해 예산과 관련, 『국민들에게 선물은 주지 못하고 세부담만 매년 증가시키면 되겠느냐』고 하자『우리도 잘 살 수 있는 「비전」이 있다』며 이 채유 사실을 들려주었다. 김 전총리는 『1천5백m 가까이 파내려 가니까 처음에 더운물이 나와 온천인가 했으나 조금 더 파니까 기름이 나왔다』고 했다. 순수한 우리 기술진에 의해 채굴했고 앞으로도 외국자본을 끌어들이지 않고 우리 힘으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김 전총리는 말했다.

<도착한 기름 놓고 건배>
이 자리에는 당시 신형식 재무위원장을 비롯, 여·야 재무위원 20여명, 김용환 재무장관, 고재일 국세, 조충훈 전매, 정해식 조달, 최대현 관세청장이 동석.
김 전총리는 정부가 공식 발표할 때까지는 석유 얘기를 입밖에 내지 말도록 당부한 뒤 비서를 시켜 기름을 가져오도록 일렀다. 의원들이 자리를 잡고 두어 잔씩 건배한 후 「기름」이 도착했다.
「사이다」병에 담아온 기름은 시커멓다. 김 전총리가 솜방망이에 이 기름을 묻혀 성냥불을 켰을 때 불길이 솟는 것을 보고 일행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그리고 다시 축하의 건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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