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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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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는 반만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때로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때로는 침체된, 그런 역사였다. 민족의 혈맥이 뛰는「의지」의 장도 있었고, 어두운「터널」같은「우울」의 장도 있었다. 오늘의 우리는 그런 역사의 면면에서 무엇을 배우고 또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역사는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만의 것일 수는 없다.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 가는 민중들과 함께 생각하고 또 반성하는 가운데 그 빛을 찾을 수 있다. 중앙일보·동양방송은 한 국사의 대중화를 위한 특별기획의 하나로 연두부터 한국사 대「심포지엄」을 계획, 연재한다. 이「심포지엄」은 권위있는 사학자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통해 선정된 국사상의 중요한 사건·인물·사상·문화등을 중심으로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내용은 대표집필자에 의해 중앙일보지상에 소개된다.
한편 그 전문은 삼성문화재단에서 간행하는 삼성문화고로 발간될 것이다.【편집자주】

<역사가의 반성>
어느 역사가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은 다 각기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가진 역사가인 것이다. 그들 모두의 역사 해석이 꼭 옳은 것인지 어떤지는 뒷 문제다. 또 그들의 견해가 모두 그들의 독자적인 것인지 어떤지도 별 문제다.
사실상 모든 사람은 그들 스스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일정한 의견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역사학을 전공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많은 그릇된 사실의 인식위에 그들의 견해가 서있다는 것을 보고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결국 역사가가 그들이 짊어진 사회적 책임의 일부를 다하지 못한데서 말미암은 것이 아닐까. 이러한 반성위에서 우리들의 대화는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히 힘에 벅찬 과제다. 우리는 처음 어디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옳은지 조차 짐작을 하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이 문제는 지금까지 한국사를 어떻게 보아왔나 하는데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이로부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멸된「고기」>
현재 우리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역사를 편찬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
단군의 건국을 적은 『고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저술년대를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이 각기 자기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것은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적인 체제를 갖추게될 무렵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3나라가 각기 편찬한 『유기』·「서기』·『국사』등 최초의 사서들은 불행히 오늘날 전하여지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들 3국이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건설하였다는 기념비와도 같은 존재인 이들 사서는 건국의 시조를 비롯한 역대제왕들의 업적을 찬양하여 국가의 위엄을 돋우려고 하였던 것이 아닐까한다. 단국신화는 비록 후대에 와서야 기록에 남게되었지만 이들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건국신화로서 오래전부터 『고기』속에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크게 보면 이와 같은 유형에 들어가면서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는 것이 김대문의 일련의 저서들이었을 것이다. 『화랑세기』나 『계림잡전』등도 오늘날 전해 오지 않으므로 그 내용을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신나 진골귀족의 상징인 화랑도의 역사를 편찬한 김대문은 분명히 전통적인 골품제도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신라의 찬란한 발전을 예찬하는 것이었으리라는 점은 넉넉히 추측할 수가 있다.
그 뒤 신라말기에 육두품의 세력이 대두하면서부터 그들 각 가문의 시조들의 천강설화가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고 왕건이 새로 고려를 건국함에 이르러서는 왕건의 선단들에 대한 설화들이 또한 사서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같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역사를 보는 관점은 설화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역사를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 적지 않고 이것을 신화나 전설과 같은 형식을 빌어서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불교와 유교를 받들게 되면서는 신앙과 도덕적 목적을 위한 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일정한 교훈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었다. 다만 불교의 경우에는 『섬국유사』의 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초인간적인 불이나 보살의 자비가 인간세계에 작용한 역사가 그려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유교의 경우에는 초인간적인 힘의 작용을 부정하고 반대로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선악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를 보게되었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에 역사는 정치의 거울이었으며, 따라서 때로는「감」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를 비롯해 고려후기로부터 조선왕조시대에 걸쳐서 편찬된 많은 관찬서들, 가령『고려사』나 『동국통감』과 같은 것들이 모두 이 후자의 예에 드는 것들이다.
이조후기에 실학자들 사이에서 역사 연구의 열이 크게 일어나서 『동사강목』과 같은 우수한 개세서가 나타났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저서들이 관찬서가 아닌 사찬서이며, 집권자가 아닌 재야학자들의 저서였다는 점에서 전기의 사서들과 성격을 달리하고있다. 이러한 차잇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 왕조중심의 흥망사였고 그 흥망의 기준을 유교적인 도덕에서 찾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20세기에 들어서 새로운 역사학이 대두하기 이전에 있어서는 이러한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전통사학에서 민족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
고려가 발해의 유민까지를 합하여 통일왕조를 건설한 이후, 특히 대몽항쟁의 시련을 거치면서 민족사의 체계를 정리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우리가 현재 알 수 있는 한, 그러한 최초의 시도는『삼국유사』에 나타나고 있으며 이어『제왕운기』에도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종래 사대주의적인 왕조라고 일컬어지던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이 전통은 이어졌다. 유교적 입장에서 이루어진「동국통감』을 비롯한 여러 사서에도 그 경향이 뚜렷하였다. 이들 여러 사서에 나타난 민족사에 대한 인식의 특징은 다음의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째는 우리나라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건국 기원을 가진 민족이었으며 그 연대는 중국과도 맞먹는 오랜 옛날이었다는 것이다.
단군의 건국신화를 역사의 첫머리로 장식하게 하고, 그 건국을 요와 동시라고 한 것이 그 증거다.

<만주땅 회고>
다음으로는 정통은상에 입각한 한국사의 체계적 인식의 노력이다.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고대사의 정리는『삼국유사』에서 모범이 이루어진 이후『동사강목』에 까지 그대로 이어진 한국사의 줄기였다. 망국시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논의가 분분하였고 발해를 통일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으로 간주해야한다는 『발해고』저자의 주장이 있는 등 이 민족사의 체계를 세우는 일은 큰 과제의 하나였다.
물론 그 체계란 것은 왕조중심의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새로운 진전이었다.
세째로 국토에 대한 인식이었다. 『동국지리지』이래 역사지리의 연구로 구체화된 이 국토에 대한 재인식의 주된 방향은 옛 강토 특히 만주에 대한 회고적이고 때로는 진취적이기도 한 주장이었다. 『발해고』는 그 두드러진 것이지만 『동사강목』에 있어서도 한국사의 무대에 송화강 이남의 만주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흥망에 큰 關心>
19세기에 이르러서 그러나 이 왕조중심의 사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서얼(양반의 서출)의 역사인 『규사』, 향사의 역사인 『연조귀감』, 그러고 화원과 같은 중인 출신의 명인들의 전기물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사의 출현은, 비록 역사서로서의 체계가 정제되지 못한 점이 있다하더라도 사학사상에서는 다음시대의 새 역사의 서막과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19세기 말엽 급박해오는 민족적 위기속에서 이 사회사적인 관점보다는 오히려 민족사적인 관점이 크게 관심을 끌게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깊은 역사학의 연구보다는 대중적인 계몽에 역점을 둔 한말의 애국주의 계몽사학이 그 구체적 표현이었다. 이들은 민족을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한 위대한 영웅들의 전기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을지문덕·연개소문·강감찬·최영·이순신등의 민족영웅이 크게 찬양되었던 것이다.
한편 국가의 흥망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이태리 독립사』·
『미국독립사』·『서서건국사지』등은 흥국의 예요, 『월남망국사』·『파란말년전사』· 『비율보전사』등은 망국의 예에 드는 것들이었다.
이같은 애국주의적 계몽사학의 전통은 1910년의 망국의 쓰라림을 겪은 이후 민족주의사관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사의 흥하고 쇠함이 민족의 혼이나 얼 혹은 고유한 사상의 흥하고 쇠함에 있다고 하는 사관을 나타낸 『한국통사』『오천년간조선의 얼』『조선역사상일천년내제일대사건』등의 저술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들의 한국사관은 요컨대 민족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마련해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1930연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개별적인 사실들을 존중하여 착실한 실증적 방법으로 그 실제를 밝히는 작업을 중요시하는 일련의 학자들이 나타났다.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 실증사학자들은 이러한 인구의 방법으로 많은 구체적 사실의 구명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개별적인 사실을 밝히는데 주력한 나머지 한국사의 체계적 인식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많았고, 따라서 일정한 사관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일부의 학자들이 민족주의사관이나 사회경제사적인 관점을 받아들여 신민족주의사관과 같은 새로운 한국사관을 수립하는 노력을 표시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대세로 살필 때에는 개별적인 연구로써 만족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서있는 현재의 시점은 바로 이러한 상황인 것이다.
이제 새로이 한국사를 보는 관점을 개척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연구방법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 새로운 연구방법은 우선 실증사학이 의존하고 있는 문헌학적인 사료의존의 태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문헌이 있음으로 해서 연구의 주제가 선정되고 또 그 문헌을 유일한 근거로 해서 사실을 밝히는 그러한 방법을 극복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역사가들은 각자의 독자적인 문제의식에 입각해서 주제를 선택하고 또 사실을 보는 관점을 가다듬어야할 것이다.

<새로운 체계를>
이러한 경우에 역사가의 주제선택은 현실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한 어느 역사가의 견해는 시사하는바가 크다고 하겠다. 현실과 동떨어진 과거는 과거속에 묻어둬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가 현재의 중요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성질의 것이어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과거가 현재에 대해 말해주는 국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때의 과거는 결코 현재의 입장에서 자의로 해석된 과거일수가 없다. 그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서 존재하는 과거 그것인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과거의 객관적 사실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역사가는 현실과 타협하여 버릴 위험이 있으며, 그것은 곧 역사학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역사학이 담당해야할 소금으로서의 구실을 잃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말하자면 역사학은 그 스스로 자기가 짊어져야 할 임무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되도록 주관을 억제하고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는 실증정신이 바람직하며, 이를 위하여 엄격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한국사를 거시적으로 보는 관점이 바람직하다.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단순한 박학다식일 수가 없다. 그것은 지식의 체계적인 정리여야만 한다.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은 역사가 개개인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따라서 한국사의 시대구분 같은 것도 반드시 고정된 이론에 의해 정리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관점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의 분야가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한국사의 흐름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면 이것 또한 결코 바람직한 일일수가 없다. 한국사에 나타난 모든 현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사학의 본질이 사실과 사실사이에 개재하는 관계의 유대를 이해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이는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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