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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사용 인장·공문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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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4면

보부상들이 사용하던 도장 7과와 청사촉농철구, 그리고 각종 공문 16책이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다. 보부상이란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간에서 교환경제를 매개하던 전문적인 시장상인들로 이들이 사용하던 각종 공문과 도장이 처음으로 이영복씨(충남 예산군 덕산면 읍내리351) 집에서 발견되어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보부상의 이 유물들은 충남예당상무지사인, 상무사 충청남도예산지부인 2개, 영위직인, 반수직인, 접장직인, 인통 1개, 그리고 공문인 임소좌목(1881) 선생안(1885) 예산임방절목(1851) 등 16책의 공문들.
보부상의 기원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특히 조선왕조 말기에는 시장세를 거둬들이고 정치에 참여할 정도의 강력한 결사체로 대두됐고 현재에도 『상무사』라고 칭하는 사단의 조직을 갖고 있다. 당초 보는 보상과 부상의 준말로서 「보상」은 상품을 보자기(보포)에 싸서 들그 다니거나 혹은 멜빵에 짊어지고 다녀 『봇짐장수』라 했고 「부상」은 지게에 지고 다녔으므로 『등짐장수』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구분이 있었으나 후에 서로 겸하게 되어 전국8도의 1천61개(만기요람)나 되는 장을 무대로 활동을 했다. 이들의 활동은 역사적으로 여진족과 싸우다가 쫓긴 이 태조를 구했고 임란 시에는 권율장군을 돕는가 하면 홍경래 난의 평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보부상들이 직접 정치나 사회에 참여한 것은 대원군이 이들 조직을 이용, 보부청을 설치하고 자신이 도반수가 되었으며 동학난시 에는 정부군에 가세하여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한·일 합방이 되면서 일본관헌에 의해 축출됐으나 유독 예산지방과 부여 지방에서만 그 명맥이 유지됐었다. 보부상의 조직은 중앙조직으로 공국당상 6명, 감무관 8명을 두어 상업과는 관계없이 정치적 기능을 관장하게 했으며 각도에는 도접장과 도반수를 두어 도내의 각 상무사를 통할하고 중앙과 일선의 중간에서 상명을 하달하고 보고를 접수 처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번 공문에서 확인된 예산상무사의 최고기관으로는 총회가 있고 그 집행기관으로는 『요중』이 있고 그 산하에 동몽청이 있었다.
『선생안』에 기록된 조직을 보면 총회에는 철저하게 민주적 방법에 의한 임원선거가 있다.
상무 「사인」이 날인된 투표용지에 후보자중 적임자를 선정, 기명투표를 하게되며 임원선거가 끝나면 향연에 들어간다.
임원들의 임기는 대체로 1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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