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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서두르면 가혹한 채찍이 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뉘엿뉘엿 한해가 저물어 간다. 되돌아 보건대 먼 회한과 안쓰러움이 놀빛으로 물들고 있다. 아니다. 새해에는 좀더 밝은 마음으로 더욱 용기를 내어 정말 짬지게 살아야겠다고 옷깃을 바로 잡는다.
지난해에 못 다했던 일들을 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위로 내 인생의 나이테가 하나 더 감기는 소리, 침묵에 둘러싸여 그 침묵의 한가운데서 내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 더 접히는 소리, 마른 잎이 떨고있다.
새벽 냉한 방의 고요에 묻혀 거기 나를 돌아본다. 촛불 한 자루 앞에서, 가물거리는 한 자루의 불꽃 앞에서 나는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아아, 한 방울의 액체, 이 넓은 우주에 외톨이로 뒹구는 나 자신을 본다.
어느 날엔 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내 몸을 본다. 여기 무슨 울고불고 할 것이 있겠느냐. 산다는 것은 그냥 정처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묵은해가 흘러가고 새해가 밀물쳐온다. 나는 그 물결 위에 어디론가 떠가는 가랑배 한잎.
볼을 치며 울고 가는 가랑잎 하나
오늘은 그 행방을 찾아 흘러가나니―
덧없다 세월이여, 그러나 여기 나는 무엇인가를 되돌아 보지 않는데서 온갖 추잡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어차피 이 몸은 부서지고야 말것인데 이제 백년후면 이 세상에 없을 몸들인데, 왜들 이러는 가, 정말 이럴 수가 없는데, 지구의 어디엔가 에서는 지금도 종교와 종교가 싸움질을 하고 있다. 며칠 전 조계사에서는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정말 불교인이었다면 그럴 수가 없는데-
뭐 구태여 종교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 마음이 한없는 평화로움과 사랑으로 충만해있다면 그곳이 바로 법당이요, 교회인 것이다.
목탁을 두드리고 찬송가를 부른다하여 거기 진리가 깃들지는 않는다. 사심 없는 마음속에, 남은 또 하나의 나라는 연민심 속에 진리의 빛은 스미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내일이 오면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무리 기다려봐도 내일은 오지 않았다. 이 사람은 말했다.
『이상하군, 왜 내일이 오지 않는가.』 내일이라는 곳에 막상 와보면 그건 이미 내일이 아니다. 오늘이다.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그럼 내일이란 무엇인가 오늘이 아직 오지 않은 상태일 따름이다.
새해에는, 새해에는 하고 벼르기에 앞서 지금 이 순간에 새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차, 내가 너무 한눈 팔았구나 하고 번쩍 정신이 들었을 그 때가 바로 새해인 것이다.
달력 위에 쓰여진 시간만이 시간의 전부는 아니다.
시간도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대의 시간과 내시간이 다르고, 소년의 시간과 어른의 시간이 다르다. 달력의 시간은 어디까지나 임시로 설정된 시간이다. 그러므로 하루에도 몇 번씩 새해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 .자신을 돌아보고 풀어진 자세를 바로잡는 순간이 많으면 그럴수록 새해를 맞이함도 또한 많아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구태여 새해가 왔다고 해서 다짐을 둘 필요가 없다.
묵은해가 저문다하여 그 기울어 가는 시간을 보고 좀더 조금만 더 머물러달라고 안타까워 하지도 않는다. 왜냐, 그의 내면에는 한순간 한순간이 불꽃튀는 열중과 가능성으로 파도치고 있는 때문이다. 「시간에 부림을 당하는」것이 아니라 「시간을 부린다」 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함이다.
시간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라 그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은 시간에 쫓겨가는 소리다. 아무리 바쁜 시간이라도 담담한 기분으로 그 바쁜 시간에 임해보라. 바쁜 시간도 역시 나를 마라 담담하게 흐를 것이다.
결코 시간에 먹혀서는 안 된다. 바삐 서두르면 그럴수록 시간은 가혹한 채찍이 된다. 소의 걸음같이, 여유있게 그러나 쉬지 않고 가는 그런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부딪칠 듯이 바삐 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꼭 무엇엔가 좇기는 자와 같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정말 그럴 필요가 없는데…….
사람은 모두 자기의 궤도가 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태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꾸준히 가는 그런 걸음에는 아예 필요치 않다. 묵은해를 보내는 후회와 새해를 맞는 새삼스러운 결심이 아예 필요치 않다. 하루하루를 새해 기분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석지현<조계종 녹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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