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권시대」의 폐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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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일 협력관계의 주축을 이루어온 청구권협정이 17일 종결됨으로써 양국관계는 이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회고컨대 청구권 협력시대로 규정지어질 지난 10년 간의 한·일 경제관계는 그 시발에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과 함께 매우 특이한 양상으로 전개되어왔다.
60년대의 일본은 전후의 복구 기를 이미 벗어나 산업자본의 고도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되었던 시기였다.
새로운 시장수요가 긴요했던 이른바 팽창 기에 접어든 일본으로서는 대외진출창구의 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었다. 한·일 경협이 비록 한 국민에 대한 보상성격과 국교정상화라는 정치적 명분에서 출발된 것이었지만, 그 실상은 본질적으로 더 경제적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한 것은 청구권 이후의 협력 「패턴」에서 두드러진 바와 같다.
5억「달러」의 유·무상대금을 공여 함으로써 일본은 그보다 훨씬 대규모의 자본·기술진출을 실현했고, 방대한 수출시장을 새로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투자면에서 그들은 자국내의 저생산성 사양산업이나 공해산업의 해외이전을 쉽게 이룩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기술협력을 통해서 그들은 적지 않은 「로열티」로 낙후기술을 재판매하는 길을 마련하기도 했었다.
꼬리 달린 재정·상업차관의 대량도입은 중간재에서 원자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수입수요를 일본에 의존하게 만들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양국무역의 극심한 불균형을 이루는 근 인이 되고있다.
「청구권」이후의 이 모든 사태는 요컨대 우리가 발전단계나 경제구조가상이한 국가간의 경제협력이 지니는 한계와 본질적 속성에 대해 지나치게 안이하게 생각한 때문이었다고 반성함 수 있다. 물론 이런 자세는 경제개발의 본격화라는 절실한 명제에 너무 집착한 결과 이기도 하다.
이제 청구권의 시효가 만료된 지금, 우리가 지난10년의 협력실태에 대한 엄정한 평가와 함께 새로운 대일 경협자세를 확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주장하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청구권시대와 판이하게 달라진 세계경제여건에 대해인식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지금의 세계는 자본의 질서만이 존재하던 구각을 벗고, 새로운 남북관계. 개별국가나 지역의 특수성과 주권의 침해 없는 상호협력으로 같이 번영해야 한다는 원칙이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하는 시대다.
이는 곧 경제운영의 기조를 더욱 절도있게, 자립적인 것으로 강요함과 동시에 외연적 확대의 한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 같은 기본인식은 앞으로의 새로운 대일 경협관계에서도 달라질 수 없다. 외자도입은 다다익선이라는 청구권시대의 환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대일 자본도입이 엄격하게 「프로젝트」 별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이는 외자의 질적 선별과 경제효율의 증대라는 점에서도 불가결하다.
아직도 우리측에서 정부「베이스」의 새로운 일괄경협방식을 요청하고 있으나, 이는 현재의 일시적인 필요 때문이므로 장기적인 기본「패턴」은 역시 민간「베이스」의 「프로젝트」별 협력이 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의 혈 채라는, 형량 할 수 없는 부채를 5억「달러」「풀러스·알파」로 씻은 듯이 변제할 수 있었던 일본은 이제 삼목 수상의 표현대로 『한국과의 종전처리가 일단락』되었다는 홀가분한 입장에 만족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일간에는 이제 새로운 「청구권」즉 인국으로서 호혜·평등에 입각한 공동번영에의 기여라는 시대적 요청이 동시에 발효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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