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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505)|등산50년(제48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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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름금강산등반>
금강산 집선봉 (CⅠ봉) 의 설계 첫등반을 수행한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그 해(37년) 여름 다시 금강산을 찾았다.
그러나 사실 이 여름등반은 당초부터 누구나 가고싶어 하는 금강의 바위를 오르며 절경속에서 수영도 해보자는 가벼운 뜻으로 계획되었다. 일행은 7명, 「리더」인 엄흥섭과 나를 비롯하여 운수회사원(이재오)·진전학생등 제각기 직업이 다른 20대 안팎의 젊은이들이었고 사업을 하는 신혼부부(이완순부부)한쌍이 끼어 이채로왔다.
장마가 걷히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인 7월25일 하오10시에 서울역을 떠난 우리는 마치 소풍가는 어린 학생들같이 떠들썩했다. 이튿날 아침 온정리에 도착하여 신계사에 짐을푼 후 첫날을 구룡연탐승으로 끝내자고 합의, 곧장 옥류동으로 향했다. 옥류동은 2년전 두터운 눈에 덮였던 때와는 판이하게 탁 트인 시야 속에 오색 영롱한 꿈의 궁전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장마 때 폭우가 맹위를 부린 듯 계류가 철철 넘쳐흘렀으나 바위와 물이 그토록 깨끗할 수가 없었다.
벽암에 영롱하게 괸 「에머럴드」빛깔의 물이 너무나 맑아 서너길 바닥까지도 들여다보이는 옥류동의 허리 연주담에서는 더 이상 참울수가 없어 모두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들은 온산을 독차지한 듯 그때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비키니·스타일」로 계속 계류를 거슬러 올라 무봉폭·비봉폭에서 다시 한바탕 물장구를 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위석급서의 물줄기를 따라 시원하기 짝이 없는 「워터·클라이밍」을 즐기면서 절묘하게 구비쳐 솟은 암애와 후벼파진 대암반에 우렁차게 역동하는 구운폭을 완상한후 귀환, 동석동어귀 법기암에서 밤을 맞았다.
이튿날은 집선봉 동북능선위 CⅡ봉 등반. 생각날 때마다 쓴웃음을 자아내게 하는-사소하나마-사고 연발의 하루였다.
물기하나 없이 살벌하게 활활 달아오르는 검고 험한 돌밭을 폭양에 허덕이며 강행군한 일행은 집선계로 접어들어 벽류를 보자 마구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시면 지친다고 엄과 내가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 그들은 거암둥행이 처음인 오합지졸인데다 두 「리더」도 이런 집단등산이 첫 경험이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인근 암벽의 2∼3배나되는 거대한 CⅡ봉의「콜로와르」를 반쯤 오르자 이들은 육지에 오른 물고기처럼 조갈을 내며 맥을 못 췄다. 게다가 가끔 낙석까지 벼락치듯 하니 공포에 질려 수족이 얼어붙어 버렸다.
엄과 나는 「피치」 마다 이들을 영치기 당기치기로 이끌었는데 암계 중간쯤 10m직벽의 거대한「촉스톤」 (「침니」의 안쪽틈에 막혀있는 돌)에 이르러「뼈다귀」인 엄마저 기진맥진, 이때부터 나는 60여kg의 짐 여섯개를 혼자서 짊어지는 꼴이 되었다. 그들은 재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마냥 주저앉을 정도고 24세의 신부는 숫제 축 늘어져 반인사불성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짐짝 다루듯하는 인체들이 거추장스런 중에도 단하나 숨을 할딱이며 감겨으르듯하는 풍요한 여체의 감촉이 20세의 이 청년 「클라이머」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켰으니 이런 악전고투끝에 「콜로와르」위에 올라선것은 하오4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여기서 CⅡ봉정상까지는 다시 2백여m의 암벽을 올라가야 한다.
이쯤 되면 서둘러 하산하는 것이 원칙, 그런데도 극성들이었다. 주저앉고 드러누운 채『정상까지 안가면 보람이 없다』 고 이구동성인 것이다. 공중높이 짖어대는 까마귀부리처럼 뾰족하게 갈라져 치솟은 CⅡ봉(1,200m)정상에 기어이 올라섰을 때는 나도 완전히 허탈상태가 되고 말았다. 하오7시 반, 무려 11시간의 괴로운 등반이었다.
젊은 나이에 빠지기 십상인 영웅심과 우월감을 느낀 나는 짐짓 피곤함을 감추고 우뚝선 채 집선련봉의 장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것은「제스처」에 지나지 않았고 눈앞에는 법기암의 이부자리 깔린 아늑한 방의 모습만 아른거릴 뿐이었다.
다만 십여m 떨어진 꽃 제단 같은 절정지점에 축 늘어져 반듯이 누운 신부가 하얀살길이 드러날 정도로 흩어진 옷맵시에 아랑곳 않고 숨결 따라 파동치는 가슴의 두봉우리를 하늘높이 오똑 새우고있는 모습이 빨간 저녁놀을 배경으로 한 폭의 환상적인 그림이 되어 「클로스업」되어 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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