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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뻘 넘어 이모뻘에 “사랑해” … 세월의 벽 허무는 연하남 콘텐트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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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년 됐다. 당시 10대였던 가수 이승기가 “누난 내 여자니까”(2004년 ‘내 여자라니까’)라며 가요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것 말이다. 문화 비평가들은 이 노래를 “연상녀·연하남 커플의 연애가 새롭게 묘사되기 시작한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이승기 전에도 연상·연하 커플을 소재로 한 가요·드라마·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어리다고 나를 놀리는 너의 친구들이 싫다”(1997년 유승준 ‘사랑해 누나’)고 힘들어하거나 연하남을 연인으로 상상조차 하지 않는 여성에게 여장을 하고 접근하는(98년 영화 ‘찜’) 등 나이 차 자체가 엄청난 갈등이란 걸 전제로 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2003년 한 연예신문은 “최근 동성애와 스토킹, 연상·연하 커플 등 ‘이상 징후’를 다룬 드라마가 늘고 있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내 여자라니까’가 연상·연하 콘텐트의 전환점으로 묘사되는 건 당당함 때문이다. 가사엔 누나뻘을 좋아하는 데 대한 망설임이나 죄책감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대신 “너라고 부를게. 뭐라고 하든지.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게”라고 연하남의 남성적 매력을 강조한다. 나이로 인한 사회적 차별에 지친 20대 후반 이상의 여성들에게 이 노래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지금의 이승기를 만든 두터운 여성 팬층이 이때 형성됐다고 보면 된다. 이승기의 경우 50세 이상만 가입할 수 있는 중년 여성으로만 이뤄진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누나·이모 팬’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후 연상·연하의 사랑을 담은 문화 콘텐트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노처녀 파티시에와 일곱 살 어린 레스토랑 사장을 주인공으로 한 ‘내 이름은 김삼순’, 여성 라디오 DJ와 여덟 살 어린 라디오 PD의 사랑을 다룬 ‘올드미스 다이어리’(이상 2005년), 치과의사인 이혼녀와 열두 살 어린 프로야구 선수가 주인공인 ‘발칙한 여자들’(2006년) 등이다.

초기 연상·연하 콘텐트의 특징은 ‘마초 연하남’이다. 이들은 나이가 어릴 뿐 직업도, 외모도, 집안도 완벽하다. 백마 탄 왕자의 연하남 버전이다. 반면에 주인공 연상녀는 통통하고 평범한 외모에 실연의 상처가 심하거나(김삼순), 시집을 못 가 집안의 구박을 받는(올드미스 다이어리)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권력 관계를 쥐는 건 오히려 연하남 쪽이었다. 사랑을 고백하고 연애를 주도해 나가는 것도 연하남. 연상녀는 다소 수동적인 태도로 적극적인 구애를 받아들이는 걸로 묘사됐다. 공희진 드라마평론가는 “연상·연하 커플에 대해 여전히 남아 있는 사회적 거부감을 없애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라며 “결국 남성이 여성을 리드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2010년 이후 연상·연하 콘텐트는 완전히 바뀐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연상녀와 착하고 매력은 넘치지만 능력은 부족한 연하남의 조합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육식동물 같은 공격성이 없이 양처럼 온순한 남자를 가리키는 ‘초식남’이란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과 시기가 비슷하다. 영화 ‘너는 펫’(2011년)은 능력 있는 30대 여기자가 20대 초반의 꽃미남을 애완동물처럼 보살피며 사랑을 느끼는 과정을, 같은 해 개봉한 ‘티끌 모아 로맨스’는 돈도 없고 의지도 없는 백수 청년이 똑순이 연상녀를 만나 인생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지난해 큰 인기를 끈 ‘너의 목소리가 들려’ ‘직장의 신’ 등의 연상·연하 드라마도 남자 주인공보다 사회적 능력이 뛰어난 연상녀가 주인공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초기 연하남들이 중년 여성 시청자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쪽으로 그려졌다면, 최근엔 여성 시청자의 모성을 자극하는 캐릭터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며 “88만원 세대의 상처와 열등감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최근엔 남녀 간 나이 차이가 20살 가까이 나는 ‘수퍼 연상·연하’ 커플이 드라마 속에서 늘고 있다. 지난주 시작된 드라마 ‘밀회’(JTBC)와 다음 달 첫 방영을 앞두고 있는 ‘마녀의 연애’(tvN)는 각각 20살, 19살 차이의 연상·연하 커플을 다룬다. JTBC 조준형 PD는 “5년 전만 해도 이런 설정에 거부감을 갖거나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이가 많았겠지만 최근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긴 해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느끼는 이들은 적은 것 같다”며 “연상·연하 커플이 워낙 보편화되다 보니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것도 ‘독특한 사례’쯤으로 이해될 수 있는 시대”라고 분석했다.

드라마 주요 시청층인 40·50대 여성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도 드라마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예전 중년 여성은 자신을 연애가 가능한 세대로 분류하지 않았다. 지금의 중년은 다르다. 특히 40대는 예전 ‘X세대’(1965~76년생)로 불렸던 자의식 강한 세대다. 개성과 감각을 중시했던 이들은 기존 중년보다 확연히 문화상품과 외모에 대한 투자를 많이 하는 걸로 분석된다. 최근 2, 3년 사이 영화 ‘건축학 개론’이나 드라마 ‘응답하라 1994’, 뮤지컬 ‘광화문 연가’ 같은 복고풍 문화상품이 계속 출시된 것도 이 계층을 노린 움직임이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예전엔 마흔을 넘기면 사실상 노후 준비를 시작하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의 40대는 여전히 로맨스를 꿈꾸는 청춘으로 자신을 인식한다”며 “매력 있는 중년 여성이 연하남을 쟁취한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많은 것도 이런 여성관과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연상·연하의 사랑을 다룬 콘텐트가 점점 늘 거라고 내다본다. 정덕현 평론가는 “드라마는 사회 현상을 반영하되, 한발 앞선 것이 특징”이라며 “연상·연하 커플이 늘고 있는 건 사회적 큰 흐름인 만큼 이 추세는 당분간 더 문화 콘텐트의 주요 소재가 될 걸로 본다”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이지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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