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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해진 괴물, 타자 마음을 꿰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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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다저스 류현진이 23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애리조나전에서 3회 초 상대 투수 트레버 케이힐의 커브를 밀어 안타를 때려내고 있다. 2014년 정규시즌 첫 타석에서 안타를 터뜨린 류현진은 희생번트를 포함해 2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시드니=게티이미지코리아]

류현진(27·LA 다저스)이 품격 높은 시즌 첫 승리를 거뒀다.

 류현진은 23일 호주 시드니 크리켓 그라운드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직구 최고 스피드는 시속 148㎞에 그쳤지만 타자 무릎 높이를 파고드는 직구와 체인지업·슬라이더가 일품이었다. 지난해 류현진의 공을 가장 잘 때렸던 애리조나 타선이 꼼짝하지 못했다.

 볼 컨트롤보다 마인드 컨트롤이 더 돋보였다. 이제 ‘소년 가장’이 아닌 ‘부잣집 둘째 아들(다저스 2선발)’ 느낌이 들었다.

 류현진이 제대로 된 안타를 맞은 건 하나뿐이었다. 2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커브를 던지다가 헤라르도 파라에게 중전안타를 허용했다. 오히려 내야 수비가 문제였다. 1-0이던 1회 말 2사 후 폴 골드슈미트의 타구를 1루수 아드리안 곤살레스가 빠뜨렸다. 안타로 기록됐지만 실책에 가까운 플레이였다. 그러나 류현진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후속타자 마틴 프라도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위기를 넘겼다.

 3-0으로 앞선 4회 말 선두타자 골드슈미트가 때린 정면타구를 2루수 디 고든이 뒤로 빠뜨리는 실책을 저질렀다. 류현진은 무사 1루 프라도를 138km짜리 느린 바깥쪽 직구로 스탠딩 삼진아웃 시켰다. 앞서 1회 때 류현진의 체인지업에 삼진을 당한 프라도가 체인지업을 노리고 있던 허를 찌른 볼 배합이었다.

미겔 몬테로를 유격수 땅볼로 요리해 병살타로 이닝이 끝나려는 순간, 유격수 핸리 라미레스가 2루를 밟으려다 늦어 주자 2명을 모두 살려줬다. 야수 선택으로 1사 1, 2루. 류현진의 얼굴은 역시 그대로였다.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피칭에만 집중했다. 홈런 타자 마크 트럼보를 우익수 플라이, 파라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쳤다.

 지난해 한 다저스 팬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이 메이저리그 팬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류현진이 한화에서 뛰었던 2012년 인천 SK전 장면이다. 한화 수비수들의 본헤드플레이 모음 같은 이 영상은 한 경기에서 나온 실책들을 편집한 것이다. 동료들의 실수가 실점으로 이어졌지만 류현진은 그저 웃었다.

 2014년 류현진은 비슷한 장면에서 미소조차 감췄다. 더 집중해 던져 기어이 삼진을 잡아냈다. 실수한 동료의 기를 살려준 것이다. 투수가 수비 실책에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수비수들과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 팀워크가 깨지고 투수는 평정심을 잃게 된다. 류현진은 표정관리를 잘하면서 ‘이기적인 투수’가 아닌 ‘동료의 실수를 감쌀 줄 아는 리더’의 모습을 보였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빅리그 2년째를 맞은 류현진이 지난해보다 여유 있어 보인다. 운동을 열심히 한 데다 식이요법도 병행하면서 몸무게를 많이 뺐다”며 “오늘 제구가 낮게 이뤄져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꼴찌 팀 한화를 이끌었던 ‘소년 가장’은 내셔널리그의 강팀 다저스의 개막 시리즈에 등판했다. 2선발 잭 그레인키(31)의 부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류현진의 기량과 품격은 메이저리그 1, 2선발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류현진은 타석에서도 더 강해졌다. 3회 선두타자로 나서 트레버 케이힐의 커브를 밀어 우중간 안타를 쳐냈다. 지난해 거의 직구만 공략했던 류현진은 느린 커브도 정확하게 받아쳤다. 4회 희생번트, 5회 삼진으로 2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다저스는 7-5로 이겼다.

 다저스는 22일 개막전에선 1실점한 클레이튼 커쇼(26)의 호투에 힘입어 3-1로 이겼다.

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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