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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힘겹고 미래는 불안 … 젊은 의사들 선택은 투쟁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대한의사협회가 원격의료 도입과 병원 영리자회사 설립에 반발해 파업을 벌인 지난 10일 전공의들이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 모여 있다. [뉴시스]

젊은 의사들이 단단히 뿔이 났다. 쌓일 대로 쌓인 화는 조절 가능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최근 한 주 동안 만난 전공의들에게서 받은 느낌이다.

 지난 19일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만난 이모(28·레지던트 3년 차)씨는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일 의사 파업의 원인이 된 정부의 원격진료 도입과 병원 영리자회사 설립 허용 움직임은 간신히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 기폭제였다는 얘기다. 다른 병원 전공의 조모씨는 “우리가 처한 모순적 상황에 대한 울분이 파업을 계기로 집단적 공분으로 표출됐다. 2차 파업 유보로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언제 다시 끓어오를지 모른다”고 말했다.

 10일의 파업에 전국의 전공의 수천 명이 가세했다. 대한의사협회(의협)의 집계로는 약 7200명(정부 발표는 약 4800명)이었다. 7200명은 전체 전공의(약 17000명)의 42%에 해당한다. 파업 발생 3일 전 대검 공안부가 ‘의사 휴업 관련 공안대책협의회’를 열고 “형사처벌과 함께 면허 취소도 당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적어도 세 명 중 한 명꼴로 집단 행동에 나섰다. 더구나 전공의들은 11일부터 병원별로 24일부터 6일간으로 예정돼 있던 2차 파업 참여를 결의해 나갔다.

 정부와 의협의 타협으로 철회된 2차 파업이 그대로 진행됐다면 70% 이상의 전공의가 참여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들은 파업 날 의원 문을 연 선배 의사들을 향해 “각성을 촉구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노환규 의협 회장은 “전공의들의 동참 열기는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정부 측 협상 대표인 권덕철 보건복지부 보건정책관도 “당혹스러운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장시간 근로, 50년 간 개선 안 돼
과연 무엇이 전공의들을 이처럼 자극한 것일까. 파업의 명분이었던 원격진료나 영리 자회사 문제가 아닌, 진짜 ‘울고 싶은’이유는 무엇일까. 대학병원 레지던트 김모씨는 “힘겨운 현실과 불안한 미래”라고 답을 했다.

 전공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힘겨운 현실은 과도한 근로와 기대 수준에 크게 못 미치는 급여다. 의협에 따르면 종합병원 전공의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108시간이다. TV 드라마에서 인턴과 레지던트의 상징은 피곤에 찌든 얼굴과 부수수한 머리.

 레지던트 오모씨는 “수술실에서 석션(Suction·혈액 등의 액체를 빨아들이는 장치)을 잡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드는 것은 드라마에서의 과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급여는 대략 한 달에 300만~400만원이다. 200만원 수준인 곳도 있다. 동년배의 일반 직장인에 비해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근로 강도나 시간을 고려할 때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최근 한 전공의는 “우리도 88만원 세대”라고 발언했다가 각계에서 질타를 당했다. “곧 888만원 세대가 되는 당신들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고된 일과 짠 보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새삼 아우성일까. “과거에는 다른 직종 종사자들도 하루 10여 시간씩 일을 했지만 이제 그런 곳은 거의 없다. 병원만 50여 년간 변하지 않았다.” 한 전공의의 말이다. 보건복지부 고위 간부는 “의학전문대학원 출신들이 전공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일을 한 경험이 있고, 나이도 제법 든 이들은 의대 출신들보다 장시간 근로와 박한 급여에 더 불만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개인회생 신청자의 40%가 의사”
“4년 또는 5년(인턴 과정은 1년이고, 레지던트 과정은 3년 또는 4년이다)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허물어졌다.” 레지던트 김모씨는 노동시간과 보수 문제에 더욱 민감해진 것은 ‘미래의 보상’에 대한 기대가 줄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불안한 미래’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대목이다. 노환규 의협 회장은 “요즘 개인회생 신청자의 약 40%가 의사·한의사·치과의사가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통계에 따르면 적어도 서울에서는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의료계의 양극화도 전공의들에게 예민한 문제다. 성형외과·안과 등 인기 분야와 외과·비뇨기과 등 비인기 분야 의사 소득의 차가 커지고, 대형병원으로 의사와 환자가 집중되는 현실도 청년 의사들을 불안케 한다. 개업의들을 더욱 위축시킬 수 있는 원격진료 도입과 병원 영리 자회사 설립 허용에 이들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전공의들이 내다보는 어두운 미래는 꼭 보수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공의 수련 때 병원 수익을 위해 비보험 진료를 은근히 권유하는 등 현실과의 타협에 익숙해져 간다. 우리 현실에서 내가 좋은 의사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방 병원 레지던트 최모씨의 자조적 발언이다. 송명제(28·명지병원 레지던트)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원가보전이 75% 수준인 나라에서 정상적 진료는 불가능하다. 100만원 짜리 진료를 75만원 밖에 못 받으니 본전을 위해 25만원짜리 건강보험 비급여 진료로 부족분을 메울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공의들은 의료수가의 ‘현실화’ 또는 ‘정상화’를 요구한다. 레지던트 오모(28)씨에게 건강보험 가입자의 부담 증가 우려를 언급하자 “지난해 건강보험공단이 3조7000억원의 흑자를 냈고, 대형 사보험 회사도 5000억원을 벌었다”고 응수했다. 전공의협의회와 의협은 의료 사보험 가입자가 점점 늘어나는 현실을 지적하며 건강보험 체계에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공의 독자 세력화 가능성도
전공의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질 가능성이 크다. 노환규 회장은 “이번 파업을 계기로 전공의들이 의료계 개혁의 주체세력으로 떠올랐다”고 진단했다. 그는 “예전에는 모이기가 힘들어 집단적 의사 표현을 잘 못했으나 이번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단시간에 조직화를 이뤄냈다”고 말했다.

 10일에 있었던 파업 뒤 정부는 수련 환경 개선 추진과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사보조인력(PA)의 합법화 유보로 전공의들의 불만을 다소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거나 다른 민감한 사안이 불거질 경우 이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설 수도 있다. 전공의협의회 간부에 따르면 “의협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회원도 많다는 것이다. 권덕철 정책관은 “수련 환경 개선 문제와 같이 전공의들이 절실하게 바라는 것들에는 사실 정부가 아니라 이들을 채용해 쓰고 있는 병원들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대형병원 간부는 “경영 환경상 단시간 내에 해결하기는 어려운 문제들”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전공의들과 정부·병원 사이에 놓인 이해의 간격은 이처럼 크다.

이상언 기자, 임지수 대학생 인턴기자 joo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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