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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수다, 노인들 언제까지 … ” “여당·야당보다 센 게 괸당”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원희룡 전 의원이 지난 16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제주지사 출마 선언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제주지사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며 큰 인물을 원하는 지역 정서에 호소했다. [중앙포토]

“아이고 이젠 지겹수다. 노인네들 언제까지 해먹젠 햄신고예(해먹을라고 하는가).”

지난 19일 오후 제주시. 하늘엔 구름이 잔뜩 꼈고, 바람도 제법 쌀쌀했다. 연동 신시가지에서 만난 강홍철(58)씨에게 “이번 도지사 선거에서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가”라고 묻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치라면 아주 신물이 남수다(난다). 줄 세우기나 하고. 그러니 제주가 이 모양아니우꽈(아닌가)”라고 했다. “그럼, 원희룡을 지지하나”라고 하자 “그만한 인재가 어디 있수과(있는가)”라고 했다.

서귀포시에서도 비슷했다. 박호정(46)씨는 “19년간 도지사는 늘 산북(한라산 북쪽) 사람만 했다. 산남 지방은 산북에 비해 인구가 3분의 1인데, 원희룡이 여기서(서귀포 중문) 태어났다. 우리도 지사 한번 내놔야 하지 않나”라고 했다.

‘현재’라는 시간대를 전제로 본다면, 원희룡 바람은 거세다. 제주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중앙SUNDAY가 19일과 20일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 만난 일반 시민 20명 중 차기 도지사로 원희룡을 지지한다는 사람은 12명이었다. 나머지 8명 중 우근민 현 지사와 야권 후보인 김우남 민주당 의원, 신구범 전 지사,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 사장을 선호한다는 사람이 한 명씩 있었고, 다른 4명은 “관심 없다”거나 “모르겠다”고 했다.

“제주가 배출했다” vs “제주를 이용했다”
여론조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여론조사업체 리서치플러스가 16, 17일 이틀간 제주 지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차기 제주지사 선호도 조사에서 원희룡 전 의원은 48.5%로 2위 그룹을 압도적으로 눌렀다. 나머지 유력 후보 7명의 지지율을 모두 합친 것(38.7%)보다 원 전 의원 혼자 얻은 게 10%포인트가량 높았다. 3자 가상대결에서도 원 전 의원은 55% 이상을 획득했다.

원희룡 지지자들의 공통된 주장은 세대교체다. “학력고사 수석, 사법시험 수석에다 서울에서 세 번이나 국회의원 한 사람이 제주에 누가 있었는가”라며 ‘제주가 배출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지금껏 그 잘나간다던 원희룡이 고향을 위해 한 게 무엇인가. 자기 필요할 때만 정치적 야심을 위해 제주를 이용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원희룡 현상은 지금껏 제주 정치판을 지배해온 이른바 ‘괸당’(권당(眷黨)에서 온 말로 친인척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 문화와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95년 민선 선거가 시작된 이후 제주도는 신구범·우근민·김태환 등 이른바 ‘제주판 3김’이라 불리는 세 명이 도지사를 번갈아 해왔다. 당을 여러 차례 바꾸고, 경선에 불복해 무소속 출마를 해도 상관없었다. “여당, 야당보다 괸당이 강하다”는 건 제주 정가를 상징하는 문구다.

괸당 문화가 뿌리내린 데엔 제주의 굴곡진 역사가 작용했다는 게 유력한 분석이다. 고희범 야권 예비후보는 “고려시대엔 몽골의 지배를 100년간 받았고, 조선시대엔 수탈을 당하면서도 최악의 유배지였다. 생존하기 위해 우리끼리 뭉쳐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일부에선 4·3 사건의 트라우마로 이념적 색깔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꺼리는 풍토가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양영철 제주대 교수는 “제주의 정치가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친소를 강조하며 ‘괸당’ 문화를 왜곡시킨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가치관·비전·정치적 성향보다는 “나랑 친하다”라는 게 투표의 제1 요소였다는 거다.

 그럼 언제부터 ‘괸당’ 문화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을까. 전문가들은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을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외국인 투자 유치가 원활해지고, 국제영어학교 등이 잇따라 건립되면서 고유한 제주 색채가 희석됐다는 진단이다. 실제로 2009년 56만 명이었던 제주도 인구는 매년 1만 명 가깝게 늘어나 현재는 6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인구 증가율만 따지면 세종시에 이어 전국 2위를 기록 중이다.

아들 교육 때문에 2년 전 제주로 내려왔다는 이미영(36)씨는 “제주에 아무 연고가 없기에 ‘아는 사람’을 찍지는 않는다. 학부모 대부분이 그렇다”고 전했다. 인터넷 매체 제이누리의 양성철 대표는 “잘난 사람은 육지로 가고 못난 사람만 남는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제주엔 있었다. 하지만 최근 다음(Daum) 본사가 들어서는 등 외부 인력이 유입되고 가시적인 변화가 보이면서 제주인의 자존감도 함께 높아졌다”고 말했다. 변화의 열망과 기존 정치에 대한 염증이 제주 출신 ‘새로운 피’ 원희룡을 통해 분출된 셈이다.

박 대통령, 4?3 추념식 참석 여부 촉각
독주 체제로 원 전 의원은 다른 후보들의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우근민 지사 측 관계자는 “원 전 의원이 출마 선언을 한 날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컨벤션 효과가 최고조인 때였다. 이제 거품이 빠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구범 전 지사는 “제주는 현재 중병을 앓고 있다. 풋내기 인턴에게 수술을 맡길지, 노련한 주치의가 집도해야 할지 도민이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선 4년 전 선거에서 현명관 후보가 선거 초반 여론조사에서 두 배 이상 앞서가다 막판 역전당한 경우를 언급했다. 양성철 대표는 “개표함을 다 열고나서야 우열을 가려질 만큼 제주 선거는 늘 초박빙이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제주 민심”이라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는 4월 3일이 이번 선거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제주 4·3 사건’이 국가추념일로 제정되고 처음 맞이하는 터라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대통령이 오기만 하면 원희룡 당선은 떼어놓은 당상”이라는 게 현재 제주도 정서다. 원 전 의원 역시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4·3 평화공원에 안장된 이들 중 몇몇은 악질 공산주의자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인사에게 대통령이 고개를 숙일 순 없다”는 일부 우파의 반발이 문제를 복잡하게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원 전 의원 측은 말을 아끼고 있다. 신구범 전 지사는 “대승적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라고 한 반면 김우남 의원은 “4·3 위원회 폐지 법안을 원 전 의원이 냈었다”며 오히려 공세를 가하고 있다.

평생 제주에서 살았다는 택시기사 허광철(61)씨는 “현재 제주 국회의원 3명 모두 왜 민주당인 줄 아는가. 4·3 사건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말을 바꿨기 때문이다. 사돈 팔촌 거슬러 올라가면 4·3 사건과 무관한 제주도민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만큼 4·3은 응어리가 깊고, 휘발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제주=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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