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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영화 속 베를린 … 공지영 『별들의 들판』선 이념갈등의 공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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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베를린은 과거일까. 아니면 미래일까. 사실 이 질문은 모호하다. 하지만 이 질문에 선뜻 대답이 떠오른다면 아마도 그들에게 베를린은 어떤 이념적 표상임에 분명하다. 베를린이라고 부름과 동시에 떠오르는 표상은 과연 무엇일까.

 2006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상영돼 화제를 모았던 중국 영화 ‘여름궁전’(감독 로예)에서 베를린은 톈안먼(天安門)의 연장선이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 속 중국 젊은 남녀들은 ‘톈안먼’을 경험했기에, 그들은 더 이상 베이징(北京)에 머물 수 없다. 그래서 떠나온 곳, 그곳이 바로 베를린이었다.

 우리 문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베를린도 집단기억과 닿는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서 묘사된 베를린 역시 후일담의 배경으로서의 대안공간이다. 한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김연수는 베를린을 개인적 체험과 집단적 기억의 교집합으로 그려낸다. 강의실보다 거리에 더 익숙했던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동베를린 사람들이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넘어오는 장면은 거리의 그들, 즉 당시의 우리를 단숨에 ‘역사의 시청자’로 만들어버렸다. 소설에 등장하는 문제적인 인물 강시우에게 베를린은 ‘북’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경로다.

 문제는 누군가에겐 유일한 길이지만 누군가에겐 금기라는 점이다. 강시우를 만났던 정 교수는 “그가 북한대사관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베를린 교민사회는 다시 격랑에 휩쓸릴 것이 분명”했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베를린이 집단적 이념의 유토피아적 표상이었다면 한국 교포들에게 베를린은 한반도 긴장의 축소판이다.

 공지영의 『별들의 들판』에 그려진, 재독 교포들의 ‘베를린’이 그렇다. 간호사와 광부로 독일에 정착하게 된 베를린은 고위험, 고수익의 공간이다. 교포들에게 ‘베를린은 독일의 섬’이었고, ‘이념이 목숨보다 중요한 때’ ‘혜택’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갈등의 공간이다. ‘북’을 언급하거나 ‘북’과 접촉하게 되면 요주의 인물로 분류돼 동포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곳, 한국의 휴전선이 그대로 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베를린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통일이 된 지 25년이 된 지금도 서독과 동독을 구분한다. 교포들에게 베를린은 한반도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한 트라우마(정신적 상처)와 금기의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2012년 개봉한 영화 ‘베를린’에 묘사된 베를린은 주목할 만하다. 얼핏 보면 ‘베를린’ 속 베를린은 남한의 국정원 요원과 북한의 비밀요원이 공존하는 이념의 표상공간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의 주요한 갈등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아니다. 남과 북의 갈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구세력과 신세력의 갈등이다. 그리고 그 갈등의 핵심에는 이념이 아닌 불법무기 거래자금과 권력 이동이 있다. 남과 북은 그저 인물을 구별하는 등번호 표식 정도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변화는 소설에서도 발견된다. 백수린의 소설 ‘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짓네’나 배수아의 여러 작품에 나타난 베를린은 정치적 운명을 가늠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들의 소설 속에서 베를린은 철저히 개인적인 체험과 기억의 공간일 뿐이다. 남·북·이데올로기, 민주화와 같은 집단적 기억의 단어들은 이들의 언어 가운데 지워져 있다. 베를린은 그저 낯선 외국어가 지배하는 노스탤지어의 공간이며 예민한 감성을 재촉하는 자극이다. 낯설기에 더욱 매력적인 여행지, 이러한 소설에서 베를린은 파리나 밀라노와 다를 바 없다. 베를린에 대한 집단적 이미지가 어느새 서서히 옅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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