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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전국학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특무대에 파견된 1백여 학생들의 활동무대는 주로 대구교외 동촌 비행장 주변-. 당시 동촌 비행장은 미군 보급물자의 집산지로 그 주변이 온통 피난 민촌이 돼있었다.
이들은 허름한 옷차림에 때로는 떡장수·오징어장수로 변장하고 나서 난민대열에 섞여 오열을 색출했다. 그러나 후방치안이 큰 문제였다.
전선은 좁아지고 일진일퇴가 계속돼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나는 조병옥 내무부 장관에게 건의해서 유구환(학련조직국장·현노량진서장) 이화식(전밀양서장) 정규헌(8대의원) 엄관일(현서대문서장) 이재훈(현감평서장) 김남윤 조종석등을 중대장으로하는 「학도경찰대」를 창설했다.
이들 2백여명은 1주간의 단기교육을 받은 다음 학도경찰의 특성을 살려 후방치안의 정예요원이 됐고 후일 지리산공비 토벌에 참가, 혁혁한 공적을 쌓았다. 이화식동지는 경찰「트럭」3대로 후생사업을 벌여 남은 수익금으로 동인치과에 있는 <「학도경찰대」가 후방치안나서 미군수색대로도 활약, 낙동강이북서 작전>
학연구국대 본부의 급식을 도맡다시피 했다.
수용(용산학련위원장) 박광근(강원학련위원장) 오정환(배재) 정운흥(경신) 남궁효(경동)등 40여명은 「유엔」군으로 한국전에 제일먼저 참전한 미제1기갑사단 수색대로 참전해 최선봉에서 싸웠다.
본래 이들은 대전이 함락될 무렵인 7월 오창권 조문환 백학규(이상 육본대위)씨의 지도하에 육본특별수색대가 됐다.
그러나 그들이 대전으로 달려갔을 때는 대전이 이미 궤멸, 「딘」소장도 행방불명이 된직후였다.
정신없이 남하하다가 그들은 영동에서 미제1기갑사단에 잡혔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곧 그들의 수색대로 활동했다.
당시 미군들은 한인을 믿으려하지 않았지만 학연출신만은 무조건 신임했다.
이들은 낙동강을 넘어 적후방 금천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적의 부대배치와 포진지 상황을 알아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의 제보를 받은 미군기들은 즉시 출격해서 적의 진지에 맹타를 가했다.
한편 낙동강 남부전선에도 호남의 학도의용군이 대거 참전했다.
전남학련은 광주가 7월 23일, 7월 25일 차례로 적의 공략을 받자 장영식 김용철 정시택 심상준등 5사단국전에 제일먼저 참전하는 한편 장충식 양경일 최태상 장세호 김오진 성동욱등 2천여명은 선경으로 부산으로 피난해서 전열을 다듬었다.
특히 장충식·천우복·정혁등 5백여명은 일본「사이다마」현 「아쓰기」비행장에서 2주간의 훈련을 받고 미제24단에 편입, 훗날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까지 참여했다.
그러나 전남학련에서 가장 용맹을 떨친 부대는 미제25사단에 배속된 정찰중대. 이 정찰중대는 전남학련의 김동준(고대) 김용철 문성기 김상우(이상 광의대) 성동욱(순중) 장재식등이 주동을 이뤘는데 이들은 적후방 5「마일」까지 침투하는 결사대였다.
특히 김동준은 적과 사생결<인천 상륙작전에도 참가>단을 나누던 감안전투에서 적에 포위된 2개 정찰소대를 구출키 위해 분전하다 직격탄을 맞아 부상, 오늘까지 아래턱에 심한 흉터가 남아있다.
당시 급박한 전황하에서 국군은 병원부족으로 격심한 고충을 겪었다. 전국학연구국대는 3군 모병관의 자격을 얻어 수많은 맹원들을 병력화 했으며 나는 오홍석 정문윤등 본부간부와 함께 박병직 외무부장관을 모시고 일선위문에 나서기도했다.
이때 국군 10개 사단과 그 예하 부대에는 학도병이 참전하지 않은 부대가 없었고 특히 다부동 안강 사계 안동 영천 포항 창원 감안 마산등 최후의 교두보에서 계급도 군번도 없이 싸우고 또 피를 흘렸다.
심지어 일본으로 유학간 안기백 이학구(이상 용산학련간부)등은 재일학도 의용군까지 창설, 미제8사단에 편입해서 낙동강전투에 참가했다.
이제 6·25를 치른지 4반세기가 지난 오늘 이들 전국학연 구국대의 호국의 얼은 어느 산하에 잠들고 있는지 헤아릴 길 없으나 그들이 뿌린 젊은 피는 국사방위에 귀중한 거름이 되어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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