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정 성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헤어짐의 아픔은 인간의 비극 중에서도 가장 한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민족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이 이산가족의 아픔은 곧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최근 조총련계 재일 동포의 모국방문 허용조치로 이산가족들은 부분적으로 해후의 감격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14일 이산가족 신정성묘 실현을 위한 서울시민궐기대회가 보여준 1천만 이산가족의 응어리진 한이 풀릴 전망은 흐리기만 하다.
남북의 1천만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은 만 4년이 넘도록 북 적의 무성의로 공전만을 거듭하고 있다. 전반적인 이산가족의 재회는커녕, 73년 7월 이후 우리가 제의한 성묘방문단 교류·노부모상봉을 위한 면회소 및 우편물교환소 설치·이산가족들의 사진교환 같은 초보적 사업마저 북적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북적은 72년의 제3차 남북적 본 회담에서 선행조건으로 이른바「조건 환경론」을 내세운 이래 인도적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적십자 본래의 사업을 외면해 왔다.
그들의 이른바 조건환경 논이란 한국의 반공시책 및 법제도의 폐기·남-북 왕래자의 인신 및 소지품 불가침과 출판 결사 통행의 자유 보장·군사적 대치상태를 해소하는 적극조치 강구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당장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합법화하고 북괴의 간첩활동 및 공산당의 조직과 선전을 허용하라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뿐더러 북괴는 당장 남-북한의 군대를 감축하고 군 장비도입 금지조치도 요구하고 있다.
물론 평화가 정착돼 남-북한이 군대와 군비를 축소할 수만 있게 된다면 그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전혀 정치적·현실적 여건의 성숙 없이 무장해제를 촉구한다는 것은 남침의 틈을 노리기 위한 억지주장일 뿐이다.
더구나 남-북한 관계에서 가장 중대하고 정밀한 정치적 고려가 가해져야 할 이러한 문제를 인도적 문제 논의의 선행조건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남-북 적 회담 본래의 사업인 이산가족문제에 북괴가 전혀 관심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노리는 것은 오직 조국의 적화통일뿐임이 명백해졌다.
그들에게는 인문애도, 가족에 대한 사랑도, 모두 이데올로기에 비할 수 없는 하찮은 유희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실은 이데올로기야말로 시대에 따라 변할 수도 있지만 인간애의 기초가 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애를 도외시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이데올로기라면 존재할 명분도 필요도 없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타락된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질곡과 비극만을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를 넘는 인간애의 뚜렷한 증거를 우리는 조총련계 재일 동포의 모국방문에서 또 한번 확인했다. 조총련계 교포들은 대부분 한국 국적이 아니라 북한 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동안 일본에서의 활동도 물론 친 북괴 적이었다. 그러함에도 이들은 스스로 속해 있던 조총련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념을 뛰어넘어 핏줄을 찾아 고향 땅을 찾지 않았는가.「조건환경」이 바뀌지 않았어도 이들은 자유롭게 가족·친지를 만나고 고향 땅을 둘러보고 돌아갔지 않았는가. 이로써 북 적의「조건 환경 론」의 허구성이 다시 한번 드러난 셈이다.
이제 북 적은 구차한 억지술책을 집어치우고 어서 빨리 응어리진 이산가족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반민족적 죄과를 씻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