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책 속의 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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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엊그제 어느 검사일가의 8명을 모두 숨지게 한 「아파트」화재가 있었다. 비통한 일이다. 누구보다 냉정한 판단력을 가졌음직한 검사의 현장지휘도 무위했던가 보다. 무려 18m의 높이를 뛰어내려 목숨들을 잃었다.
이들은 창문탈출 이외의 방법을 발견할 수 없었을까. 화재의 현장을 보면, 「아파트」8층은 밀폐되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불길을 피해 빠져나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탈출구는 현관뿐이었다. 그러나 이 문은 육중한 철제「셔터」에다 문고리도 이중으로 잠겨있었다. 위급한 순간에 촌각의 판단으로 박차고 나가기엔 절벽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설령 그 현관을 벗어나갈 수 있었다고 해도 문제는 또 있다. 실외의 비상구가 없다. 게다가 소화시설은 모양으로만 놓아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검사택에만 있을 수 있는 비극은 아니다. 그 「아파트」의 경우, 다른 가구들도 한결같이 철제「셔터」를 내린 현관에 이중 자물쇠를 잠그고, 비상구 없는 상황에서 불이 검사택 아닌 다른 가구에서 일어났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어디 그 「아파트」뿐이겠는가. 필경 전국에 산재해있는 모든 「아파트」의 형편이 엇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마치 격랑을 헤쳐가는 조각배 속에서 구명대를 걸치고 있어야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의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정말 구명대를 머리맡에 놓고 자다가 여차한 때면 그것을 타고 창구탈출이라도 해야 할 형편인 것이다.
비단 「아파트」가 아니라도 천지의 웬만한 주택들도 차이라면 고·저의 차이나 있을까「아파트」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우선 높다란 담장에 철조망을 두르고있어서 외부침입은 고사하고 내부탈출로 막아놓고 있다. 대문도 역시 철제에다 자물쇠를 단단히 매달아놓고 있다. 집안의 방들도 똑같다. 아예 철책으로 단절을 해놓아 어디 벗어날 틈도 없다. 유리창이라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조건이 되어있지 않다.
상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셔터」를 내려놓아 불이 나면 밖에서 쉽게 끌 수도 없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꼼짝없이 앉은 채로 당하고 만다. 도둑을 막기위해 스스로를 또한 철책 속의 죄수로 가둬두고 있는 셈이다.
필경 「아파트」의 화재는 다만 「아파트」에서 발생한 것이 다를 뿐, 그 주변의 상황은 어디에서나 거의 같다. 「아파트」에서도, 상가에서도, 그리고 일반주택들에서도-.
결국 우리는 밀폐된 방에서 다만 천행으로 화재가 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살고있다. 일단 불이 나면 비극의 상황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결과로 나타난다.
화재 하나의 경우를 놓고 보아도 사회의 안정이 전제조건이다. 아무리 고층「빌딩」에서, 혹은 호화주택에서 철탑을 두르고 살아도 사회에 도둑이 횡행하는 따위의 상황에선 안전도 안정도 없다. 아픈 교훈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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