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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웃음이 우리를 구원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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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이전 칼럼(2012년 9월 7일자)에도 등장했던 ‘중딩 시절의 오빠’는 (배우치고) 수려한 외모는 아니었다. “어린애가 취향 참 특이하다”는 엄마의 타박을 들으면서도 꿋꿋이 ‘팬질’을 이어갔던 건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보여주던 빛나는 유머감각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땐 학교에서 제일 웃기는 선생님을 좋아했다. 아끼는 외국 배우를 고르라면 (브래드 피트 빼고) 잭 블랙이요, 다시 보기로라도 꼭 챙겨보는 TV 프로는 ‘무한도전’과 ‘개그콘서트’, 좋은 만화는 많지만 ‘웃기는 만화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매혹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매력 중 단 하나를 고르라면, 늘 그렇게 웃음이었다.

 정작 남을 웃기는 덴 젬병이면서 왜 이렇게 유머에 집착할까. 스스로도 궁금해 ‘웃음의 의미’을 탐구한 작품을 찾아보기도 했다.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도,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도 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일본 작가 미타니 고키의 ‘웃음의 대학’이다. 작품의 배경은 1940년 전쟁 중의 일본, 경시청에서 희곡을 검열하는 검열관과 희극작가가 벌이는 7일간의 해프닝을 그린 이 작품은 90년대 일본 연극계를 떠들썩하게 한 히트작이다. 2004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2008년부터 대학로에서 공연을 시작해 스테디셀러 연극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 ‘웃음의 대학(笑の大學)’.

 “모든 국민이 단결해야 하는 이 중대한 시기에 웃기는 연극이라니”라는 검열관은 작가의 대본을 사사건건 트집 잡는다. ‘나라를 위해’라는 대사를 꼭 집어넣으라든가, 멋진 경찰을 등장시키라는 요구 등이다. 하지만 작가는 모든 요구에 응하면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발휘해 웃기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런 작가와 티격태격하며 차츰 ‘웃음의 힘’에 빠져드는 검열관. 국가가 강요하는 가치에 매몰돼 ‘나’를 잃어버렸던 그는 극의 마지막, 소집명령을 받고 전장으로 떠나는 작가에게 고백한다. “이렇게 재미있는 세계가 있는 줄 몰랐어. (…) 꼭 살아서 돌아와. ‘나라를 위해 죽는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말게.”

 세상은 자주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루는 고되고, 희망은 흐릿하다. 이런 일상, 사소한 취향과 실없는 농담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나는 믿는다. 지난 1년 10개월간 이 칼럼을 써 왔다. 그동안 편파적인 취향을 마구 투척하는 글을 기껍게 읽어주신, 손발을 수축시키는 유머에도 “빵 터졌다”는 과장된 반응으로 ‘웃음 오타쿠’를 격려해주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리며.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