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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고생시키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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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아연
작가

호주에 살 때 이야기다. 10년쯤 전 양로원에서 6개월 정도 일한 적이 있다. 짐작하다시피 노인요양시설에서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장례 치를 일이 생기곤 하는데 간병하고 시중 들던 노인이 돌아가시면 방을 정리해 드리는 것으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다.

 입주 기간에 따라, 방 주인에 따라 유품의 양이나 종류가 달라진다. 생전에 소유를 즐겼던 분들은 유독 이것저것 소지품을 많이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기 마련이다.

 쇠약하고 병약해진 몸으로 외출할 일도 거의 없고 ‘시설’에서 생활하니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 몇 벌, 실내화 두어 켤레만 있으면 더 이상은 뭐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성정이 아기자기한 할머니들이 그러하다. 마치 10대 소녀나 새댁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소품이나 세간을 가지고 들어오거나 가족이나 지인들의 면회 때 부탁해서 계속 사들이는 경우도 있다.

 사물함이나 장롱에 옷과 구두가 가득한 소싯적 ‘한 멋’ 했던 할머니들도 있다. 노구를 침상에 붙박은 채 여생을 마칠 처지임에도 일어나자마자 이 옷을 입을지, 저 옷이 좋을지, 연회장에라도 가는 듯 매일 아침 그날의 ‘드레스 코드’를 정하고 ‘컨셉트’에 맞게 메이크업까지 정성스레 한 후 곧장 침대 안으로 다시 든다.

 일평생 지적 활동을 해 온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언어나 개념과 연관된 추상적 사고 기능에 혼란과 장애가 있음에도 사방에 책을 꽂아 두고 버릇처럼 이 책, 저 책을 펼치거나 신문을 스크랩하며 종일을 보낸다.

 살아서는 나가지 못할 곳, 유명을 달리할 회색 지대, 이승과 저승의 환승역 같은 공간 안에서도 평생 살아온 습관대로 시간을 이어가는 것이다. 걸머졌던 자질구레한 것들을 종당엔 몸 비늘처럼 부려놓은 채 세상을 떠날지라도.

 누구에게나 자기 방식대로 살 권리가 있고 죽는 날까지 재밋거리가 있어야 하지만 사후에 너무 많은 것을 남겨두는 것은 별로 달가워 보이지 않는다. 돈과 단순 교환했을 뿐인 사연 없는 물건들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 가치가 담긴 것들조차도 거추장스럽긴 마찬가지다.

 ‘시설’에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직원들의 평가는 두 갈래다. 사후에 치다꺼리할 게 적으면 ‘고마운 분’, 잡다하게 처리할 것을 많이 남겨두고 가시면 ‘성가신 분’이다.

 호주 요양원에는 유족들이 유품을 거두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니 뒷정리는 직원들의 몫이 되고 일이 많아지면 자연 짜증이 난다. 고인에 대한 추억이나 그간의 정리(情理)도 슬며시 퇴색할 정도로 말이다.

 너무나 단출해 보따리 하나 달랑 건네는 것도 민망한 일이지만, 이삿짐 꾸리듯 몇 박스씩 넘겨주며 유족들의 난감한 표정을 보는 것도 곤혹스럽다.

 어찌 양로원의 일이기만 할까. 오늘 내 죽음을 만나지 말란 법이 없는데 너무 산만하고 잡다하게 이것저것 가지고 있다면 그걸 정리해야 하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신세 지기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태어날 때와 죽을 때만큼은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하니 너무 많은 것을 두고 떠나지 말 일이다. 돈도 되지 못하는 것들, 더구나 죽은 자의 것은 소유하기를 꺼리는 우리 문화에서는 거의 모두 버릴 것들인 바에야.

 물질이 흔하고 뭔가를 사들이는 것이 중독 현상처럼 된 요즘 사회에서 모르긴 해도 집집마다 물건이 넘쳐날 텐데 오늘 내가 죽는다면 그걸 누가 다 치운단 말인가.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고? 요즘 혼자 살다 보니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으면 누군가 내 짐을 정리해야 할 테니 매우 미안하다는 생각을 수시로 하게 돼서 그렇다.

 나는 검박하고 단출하게 사는 편에 속하지만 치워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전히 얼마나 일이 많겠나 싶고, 그가 만약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없앨 게 많을수록 마음은 또 얼마나 아릴까 싶다.

 사계절의 나라 한국에서 다시 살게 된 후 옷도 신도 새로 장만하고 욕심을 부리느라 무엇보다 책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봄이 되니 또 뭔가를 사고 싶어 근질거리지만 ‘누구 고생시키려고’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을 접는다.

신아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