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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제47화)전국학련|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감옥의 연서>
공교롭게 우리를 중부서로 연행하는 것은 전병두 동지였다.
전 동지는 해방 후 좌익천하인 고대에서 내가 학생위원장이 되게 한 1등 공신이며 학년 초창기에 명성을 떨친 천하장사였다.
그는 경찰관이 되어 있었고 직책상 『미안하이, 미안하이』를 연발하며 중부서로 데리고 갔다.
전 동지가 경찰에 들어간 것은 바로 우리 추천에 의해서였다.
해방 후 국내치안은 극도로 어지러워 「국방경비대」와 「군사영어학교」가 있었지만 혼란을 수습할 수 없었고 자연 경찰력에 의존했다.
그러나 따로 새 경찰력이 있을 리 없었고 할 수 없이 일제시의 경찰을 그대로 채용했다.
그래서 당시 경찰은 친일파가 많았다.
이 문제는 사회에 큰 논란거리가 됐다. 항일 독립투사를 핍박한 그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어떻게 「민중의 지팡이」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경무부장 조병왕 박사를 찾아가 친일경찰의 정리를 주장하고 「학사경찰」의 채용을 건의했다.
대학을 나온 유능한 「엘리트」를 경찰에 투입해 명실공히 민주경제을 만들자고 했다.
그때 전국 학련에는 반탁투쟁의 선봉을 섰다가 대학을 졸업한 맹장들이 많았다.
조 박사는 흔쾌히 우리 제의를 받아들여 전병두 이규형 우자환 김영태 강재동 등 14명이 경찰에 들어갔다.
그들은 조 박사의 특명으로 경찰전문학교에서 속성훈련을 마친 다음 현직에 들어가 경찰의 주력부대가 됐다.
그러나 기존경찰은 이들 학사경찰을 경원했다. 특히 나를 미워했다.
『철승이가 친일경찰 몰아내고 학련동지들로 대체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노덕술 수사과장이 나를 되게 몰아치는 이유도 이런 경찰내부사정에 연유한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내 손으로 올가미를 뒤집어 쓴 격이 되어 유치장에 갇혔다.
당시 학련은 해방 2주년기념대회를 준비하랴 또 좌익의 8·15 중앙방송국 습격설에 대비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데 위원장인 내가 유치장에 갇혔으니 만사휴의 였다.
매일같이 감방에 드러누워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엉뚱한 일이 터졌다. 당시 나는 학련여학생부장 김창희(당시 여의대)양과 남몰래 사랑을 쌓고있던 터였다. 그녀는 매일같이 면회와 이덕찬(고대·무궁화제복 부사장)몫까지 두개의 사식을 넣어 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나한테 올 도시락이 이 군 앞으로 잘못 배달됐다.
나는 105호 감방, 이 군은 101호 감방, 밥이야 똑같은 도시락이니 상관없지만 문제는 그 속에 감춰둔 편지가 문제였다.
김 양은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도시락 밑에 「드로프스」를 넣고 그 속에 요샛말로 「러브레터」를 넣었던 모양이었다.
익살맞은 이 군은 「드로프스」를 다 먹었다. 물론 편지도 다 읽었다.
그러나 문제의 편지는 끝내 전해주지 않고 유치장 창 밖을 향해 내가 들으라고 줄줄 외어댔다.
『창살 박힌 감옥에서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당신이 어디에 계시든 제 마음은 항상 당신 곁에 있습니다…운운.』 이래서 나의 은밀한 사랑의 역사는 엉뚱하게 감방에서 폭로되고 말았다.
우리가 유치장에 있는 동안 김구 선생은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인촌의 부인께서 친히 와서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제일 난처해진 것은 조병왕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청장.
나와의 친분도 문제려니와 직계 부하의 체면도 살릴 겸 「하지」 사령관의 눈치도 살필 겸 무던히 고심했다.
그러나 이 박사가 불러다가 호통을 치고 조소묘 신익희 선생 등 임정요인들이 압력을 넣어나는 9일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내가 유치장에서 나온 그 이튿날 속칭 한성중학생 법원 소요사건이 터졌다. 한성중학 좌익학생 2백여 명이 서울형사지법 1호 법정에 몰려와 그날 선고공판중인 그들의 교장 박준영(당시 조선교육자 동맹위원장)의 재판을 취소하라고 「데모」를 벌인 것이다.
박 교장은 좌익의 골수분자로서 교사도 좌익열성분자를 채용하고 교기와 「배지」까지도 붉은 색으로 만들었다.
자연 학생들도 좌익이 세어 교정에서 공공연히 적기가를 부르고 우익학생들을 구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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