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학연(제47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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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입학원서탈취
1947년 7월5일, 입학시험이 시작되기 하루전날, 고대에서는 입학원서 뭉치가 백주에 감쪽같이 없어져 때아닌 소동이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이면 시험장에서 수험표와 대조할 「입학원서 원본」을 도난당했으니 그대로가면 입시를 치르기가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까닭이 있어 일어났다. 해방후 제1전문부와 제2전문부로 개편되어오던 「보전」이 문교부의 학제변경에 따라 고려대학교로 승격했고 전문부졸업생들이 학부에 남기 위해서는 타교에서 전입해오는 학생들과 같이 정식으로 편입시험을 치러야 했다.
동일교 보전출신까지 학부진학시험을 거쳐야한다는 주장은 찬반양론이 일었으나 학교당국은 일부 교수들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여 시험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학생측으로 보아서는 해방후 좌우의 대립으로 인한 학생운동, 반탁활동은 물론 학원마비상태를 풀어내는데 쏟은 시간과 정력등으로 면학에 열중할 수 없었던것도 이해받아야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 당국에 대해 학원수호 학생들이 시험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특별히 고려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놓았다.
『①우익학생들은 보전을 졸업한 학생이다. 그리고 그동안 국대안파동등 좌익의 「스트라이크」와 「테러」속에서도 애교운동에 앞장서온 학생들이다. ②서울대학교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도 학생들이 부족해서 타교에서까지 마구 편입시키는 판국인데 왜 보전출신이 동일계 학교에 남을 수 없단 말인가.
우익학생의 전위부대가 시험에 떨어져 나가면 자연히 학원은 곧 좌익학생 소굴이 될 것 아닌가. ③좌익교수들은 시험문제까지도 좌익학생들에게 은밀히 알려주어 입학시키려는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는 판국인데 여기에 반해 우익교수들은 아무대처도 못하고 기회주의적 교수 또한 결국 좌익교수편이 되는 현실을 외면하고 오직 「전학련」간부와 우익학생동지들을 잘라내려 하는가. 』등등.
학련동지들의 원성도 컸다. 『위원장 당신이 좌익「스트라이크」만 막고 학교만 지켜주면 진학문제는 책임져 준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이게 웬말이냐?』고 압력이 대단했다.
나는 현상윤총장, 전진오학장등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그러나 신통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기로 했다.
마침내 나는 동지들을 사수하기 위해 교무과에 뛰어 들어가 「입학원서 철」을 탈취해 내기로 한 것이다.
그 날 하오5시께, 교무과직원들은 다음날 시험준비로 눈코뜰새없이 바빴다.
나는 김유조 이덕원 양근춘동지등과 사전계획한대로 교무과에 들어갔다. 우리는 『수고 많으십니다』『굉장히 바쁘시군요』라고 말을 걸고는 한 사람씩 직원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성거렸다.
그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자 김유조동지가 입학원서뭉치를 들고 미리 열어놓은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그들은 약속장소인 학교뒷산 개운사에서 나와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뒤따라 우리도 개운사로 갔다.
탈취해온 입학원서는 한장이라도 분실되지 않도록 개운사승방에 쌓아놓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학련감찰부의 박혜호 (조공) , 박삼봉(휘문), 최일(대동상)등 감시원을 붙여놓았다. 그리고는 학교에 내려와 분위기를 살펴봤다.
예상했던대로 총장실에는 불이 켜지고 긴급교무회의를 열고 법석이었다.
나는 『왜들 그러십니까.』하면서 시치미를 떼고 진상을 알고 있는지 여부를 교직원들에게 확인했으나 일단 나한테 의심을 두고 있는것 같았다.
입시원서가 없어지자 현총장은 이 사실을 인촌에게 보고했고, 인촌은 이 보고를 받자 한민당총무회의 사회를 보다 말고 학교에 달려오셨다.
오시자마자 인촌은 『철승이 어디 갔어! 철승이를 찾아와. 철승이가 아니면 누가 이런일을 했겠는가?』라며 나만 찾았다.
나는 인촌앞에 불려갔다. 인촌은 『자네는 지난날 학병갈때도 학교의 위기를 극복해 주었다. 해방된 오늘날 학교의 재건도 자네들의 헌신적인 공훈에 있었다는 것도 잘 안다. 전공이 가상하지, 이제 와서 자네가 학교를 망칠작정이냐』고 사정반 꾸중반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전연 그런 사실을 모르겠다고 머리를 긁으면서 부인했다.
그렇지만 선생의 실색된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겁도 나고 안됐다 싶은 생각도 났다. 한참후 나는 『어디 가서 알아보지요. 누가 그랬는가?』라고 말하고, 그 길로 개운사를 찾아가 입학원서뭉치를 되돌려 주도록 했다. 그 결과 무사히 입학시험은 착오없이 치렀다.
이 사건으로 「혹떼려다 혹붙인격」으로 우익동지들은 진학을 못하게 되고 말았다. 나 역시 그 동지들에 대한 책임과 의리로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다.
그러나 「전학련」활동과 학교전체의 입장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계속 학교에 남아 있기로 했다. 어떻든 그때의 내 입장은 퍽 난감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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