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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전국학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윤복과 장영규
고대에서의 선수「스카웃」과 그의 재정적 뒷받침에 관한 얘기를 한다면 서윤복선수의 「스카웃」과 장영규선생의 후원을 빼놓을 수 없다.
1947년3월, 미국「보스턴」국제 「마라톤」대회에서 선수 파견초청장을 받은 「한국육상경기연맹」은 선수파견선발대회를 열어 1착으로 우승한 당시 건국전문학교학생 서윤복선수를 파켠키로 했다.
나는 서선수가 탐이 났다.
서선수를 고대학생으로 편입시켜 놓으면 고대의 명예를 크게 선양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선수와는 일면식도 없는 터라 김원권체육담당교수와 손기정선수를 통해 소개를 받고 수차교섭끝에 고대학생의 신분으로 「보스턴」 대회에 출전하겠다는 내락을 받았다.
학교당국과는 사전 협의를 하지 않은채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미군정권시절이었기 때문에 도미한다는 일이 극히 힘들었고 우선 재정보증서가 문제됐다.
그래서 어려운 교섭끝에 당시 육련이사장인 정상희씨의 주선으로 미국에 있는 한국교포 백남용씨로부터 재정보증서를 받아냈다.
그런데도 「하지」장군은 그 재정보증서가 신빙성이 없다고 거듭 출국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던중 우연히 후원의 손길이 뻗쳤다. 「하지」가 서선수의 출국거부를 밝히는 기자회견자리에 나갔던 손기정·남승룡선수가 힘없이 돌아서서 정문을 나오는 순간 등뒤에서 『여보시오! 여보시오!』하는 여자목소리가 들려왔다.
미군정청 체육과장인 「스매딜리」여사였다. 딱한 광경을 시종 목격한 「스매딜리」여사는 마침내 자기가 비용의 일부인 6백 「달러」를 선뜻 희사하겠다고 제의했다. 뿐만아니라 그녀는 「러치」장관에게 1천5백「달러」, 그리고 「언더우드」씨에게 2천 「달러」를 부탁하는등 모금운동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나는 심복석(재미)·이덕원·이덕지 동지 및 권태하·정상희씨등과 함께 각계각층을 돌아다니며 찬조금을 모금했다.
그당시 장택상청장의 소개를 받아 조흥은행의 정운용두취를 찾아가 처음에는 거절당했다가 그 뒤 도리어 크게 후원을 받았던 일도 있다.
한편 학련의 맹원들을 남녀혼성 「팀」으로 7개조를 편성, 시내 요소에 성금함을 배치해서 큰 성과를 거뒀다.
최자근(성대)·현애경(배화)·배흥원(선린)의 화신조, 최규직(세의대)·이윤재(배화)·안중선(보성)의 광화문조, 이기환·장희자(숙명)·김덕재(휘문)의 명동조, 박영철(사대)·허경자(수도녀)·정룡막(배재)의 충무노조, 임달형(공대)·조승일(상명)·허백(동성)의 서울역조, 한 장식(동대)·송형자(한성)·유기호(성남)의 종로4가조, 임성보(덕성)·이건형(양정)·배종묵의 을지로6가조등등….
서선수의 「유니폼」은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시설이 보잘것없어 광목으로 만든것이었다.
그 광목 「유니폼」에 「코리어·유니버시티」란 「마크」를 크게 박아입고 출전한 서선수가 온국민이 기대했던대로 우승(2시간25분39초)의 영예를 차지했을 때 그 기쁨이 가위 어떠했던가를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현지에서 서선수의 우승하는 순간을 목격한 임영신여사는 눈물의 포옹을 나누었고 이감격적인 소식을 이부사에게 연락해 크게 치하토록했다.
해방된 조국,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자주독립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거듭되는 혼란속에 우왕좌왕하던 그 무렵 서선수의 우승은 우리민족의 국위와 고대의 명예를 전세계에 떨친 눈물겨운 쾌사였다.
국내외기자들이 고대에 몰려들었고 현총장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고 열을 올렸다.
그러나 총장실에 몰려든 기자들이 『얼마나 기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현총장은 『무엇이요? 나는 금시초문인데요!』라고 답변해서 난처하게 됐다.
나는 마침내 현총장에게 그간의 경위를 뒤늦게 보고 드리고 서선수의 고대편입을 강청했다.
현청장께서는 『학교에는 엄연히 학칙이 있는 법인데 자네 마음대로 그런짓 한것을 용납할 수 없네』라고 들어주시지 않았다.
나는 도리어 『고대개교이래 고대선전을 이렇게 세계적으로 한일이 있읍니까. 선전비 1백만 「달러」이상을 벌지 않았읍니까』 라고 대들었다.
나는 인촌을 찾아가 통사정하기로 했다. 인촌은 『그 동기가 애국애교의 충정에서 비롯되있고 그 결과도 역시 나라와 학교의 명예를 드높였으니 다행이지만 학교의 규칙을 어긴점은 분명하다』고 꾸중하셨다.
그러시면서도 여러가지 궁리끝에 현총장의 기분도 맞추고 나의 애교심도 인정하기 위해서 선수를 소급해서 입학허가를 시킬 수 있는 예외규정을 적용해 문제를 수습했다.
선수들을 「스카웃」해놓자 재정문제가 크게 문제됐다.
나는 나와 가까운 장부억동지의 부친 전북옥청출신의 2만석꾼 장영규씨를 찾아가 통사정 끝에 옥토5만평 2백섬 농지문서를 기부받아 고대체육부 육성기금으로 학교에 바쳤다. 자랑 같은 얘기지만 인촌은 이를 보고 『자네는 고대의 명예총장이군』이라고 농담을 하신일이 있다.
이재산은 그뒤 고우보육회를 발족시킬때까지 고대체육부를 육성해 나갈수 있는 기틀이 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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