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The New York Times

푸틴에게 도발 빌미를 준 오바마의 우유부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

러시아가 크림반도 병합에 나선다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 탓일까. 당연히 아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확장과 미국의 이라크 전쟁, 발칸반도·리비아에서의 대량 살상을 막기 위한 서구 개입 탓도 아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부른 책임은 오롯이 러시아 제국주의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있다.

 그러나 좀 더 시각을 넓혀보자. 크림반도 사태는 오바마 행정부의 고질적 현실주의(realism) 정책 결여를 다시 도마에 올렸다. 오바마의 세계관은 바뀌어야 한다. 지난 5년간 오바마 행정부는 “전쟁의 파도가 물러가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미국의 이익이나 가치가 손상받지 않으면서 세계에서 발을 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는 미국이 유약하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푸틴 같은 사람에게 유약함은 도발의 빌미를 줄 뿐이다. 푸틴은 미국의 대러시아 리셋(reset) 정책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리셋 정책은 미국의 미사일방어계획 축소와 동유럽과 그루지야 내 미국 동맹 세력의 약화를 불렀다. NATO 확대는 연기됐다. 새 전략무기감축협정은 미국에만 대대적 감축이 부과됐다. 그런데도 오바마는 “더 많은 유연성”을 약속했다.

 푸틴은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오바마의 확고한 결의가 모자란다는 점을 간파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은 성공보다 철수를 염두에 두고 군사적 결정을 내렸다. 국방예산은 전략이 아니라 단순한 희망에 따라 대폭 감축됐다. 이란과 중국은 미국의 동맹국을 위협해도 눈에 띄는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최악은 바샤르 알아사드 체제의 시리아다. 자국민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해 오바마가 설정한 금지선(red line)을 넘었지만, 그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푸틴에게 우유부단은 도발의 기회를 준다. 푸틴한테 세계는 잔인하고 냉소적인 곳이다. 힘이 숭배받고 나약함이 경멸되며 제로섬 게임밖에 없는 세계 말이다. 그는 소련의 몰락을 ‘20세기 최악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본다. 당연히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이웃 국가를 독립국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푸틴의 크림반도 도발이 세계에서 미국의 신뢰 추락을 반영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중국 민족주의자, 알카에다, 이란 신권주의자를 비롯한 호전적 세력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크림반도 사태는 오바마가 이런 현실을 깨닫고 세계 리더로서의 미국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나가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두 개의 다른 대응을 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것은 위기관리다. 동맹국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지탱하면서 불안해하는 동유럽과 발트 제국을 안심시켜야 한다. 푸틴에게는 강력한 연합전선을 보여주어 위기가 악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러시아에 군사적 행동을 취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러시아 정부 관리에게 제재를 가하고 러시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NATO군 주둔을 늘리고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군사훈련을 강화해야 한다. 소치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을 보이콧하고 다른 곳에서 G7 회담을 개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크라이나 애국자들은 국가의 분열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병합되더라도 우크라이나에게는 자유와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EU 회원국이 될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잡으려면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을 통합하고 개혁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서구 또한 필요한 재정 및 기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푸틴이 몰고 온 어둠의 세계가 다른 곳으로 퍼지는 걸 막으려면 우리 스스로 도덕적·지적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오바마의 말대로, 우리는 “러시아와 경쟁하는 게 아니다”라고 믿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푸틴은 분명 미국과 경쟁하고 있다. 현실을 외면하면 강대국에 걸맞은 외교정책을 세울 수 없다.

 미국은 푸틴 이후도 내다봐야 한다. 지금은 푸틴이 강력해 보일지 몰라도 내부에서는 썩어가고 있다. 푸틴의 러시아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강대국이 아니다. 부패와 독재로 유지되는 주유소일 뿐이다. 우크라이나가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을 몰아낸 것과 같은 이유와 방식으로 언젠가는 러시아인들도 푸틴에게 달려들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

 역사의 대하는 우크라이나와 함께 흘러간다. 우리는 제국주의적 부정축재 정치가 아닌 서구의 정치적 가치가 세계의 희망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이번 위기를 극복하고 유럽에 확고하게 닻을 내린 독립국으로 번영을 구가한다면, 머지않아 러시아 국민은 “왜 우리는 아닌가”라고 묻기 시작할 것이다.

 미국의 위대한 힘은 인류 진보에 대한 비전이다. 그러나 희망은 저절로 현실이 될 수 없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희망을 위협하는 어둠을 견제할 수 없다. 미국은 현실주의와 힘, 그리고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크림반도 사태로도 이 사실에 눈뜨지 못한다면 도대체 언제 깨우칠 수 있겠는가.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

◆원문은 중앙일보 발행 코리아중앙데일리-인터내셔널뉴욕타임스 3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