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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441)|전국학연(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비밀 「아지트」>
반탁학련사무실을 서울역 앞「세브란스」의 전 구내에서 청계천 2가 「서울적십자사」 자리(관수동)로 옮긴 것은 46년2월말. 그러니까 반탁학련 발족 후 두달 쯤 후였다. 일제 시대엔 「여자합숙소」라 불린 이 적산건물은 아래층을 황신덕·박순천여사 등이 이끌던 애국부인회가, 2층은 학련이 사무실로 썼다. 사무실이라야 책상 몇 개와 전화통이 하나, 허름한 난로가 전부였다. 그러나 열혈청년 학도들이 모이니 왁자지껄하기 마련이어서 황여사께서 『좀 조용히 해달라』고 종종 통사정을 해오곤 했다.
학련사무실을 옮긴 직후인 3월초께 일까? 동가식 서가숙하던 나에게 방 한 칸이 생겼다. 조소앙선생께서 내가 떠돌이생활을 한다는 것을 아시고 자기친척되는 조경규씨에게 부탁해서 방 하나를 알선해 주셨다. 청계천3가 명성여고 정문앞에 있는 낡은 3층 건물 꼭대기의 다다미 방-.
그전까지는 삼선교 김진악 선배댁의 하숙집에는 가끔 한번씩 들렀고 나중엔 미안해서 원서동에 있는 박석규 군 집에 짐을 맡기곤 박군 집 아니면 인촌댁 사랑방, 그렇지 않으면 학련사무실 등을 전전했다.
학련사무실에서 동지들과 새우잠을 잘 때면 아침에 일어나 난로재 때문에 새까매진 얼굴들을 마주보며 서로 놀려대는 것이 일쑤였다.
그러나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인촌댁을 거쳐 가희동 전용정선생 댁에 가서 활동자금을 타내고 김구선생 댁인 경교장, 조소앙, 신익희선생 등 임정요인들이 묵고 있는 한미「호텔」을 방문하는 한편 학교에도 나가 강의를 들어야 했다. 하오엔 반탁학련 사무실에 들러 매일 터지는 대소 「테러」 사건, 행사대책 등을 세우고 각종 회의에도 나갔다.
어쨌든 새로 방 하나를 얻은 그 집은 본래 대종구에서 운영하는 화광교원이었고 그 때는 이북에서 내려와 올데갈데 없는 5, 6가구 30여명이 들어와 살았다. 그래서 「피난민 합숙소」라고 불렀다. 학련사무실이 가까와 비밀 「아지트」 로서는 안성마춤이어서 가까운 동지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다만 참모들인 윤원구·김린수·계훈제군 등과 넷이서 합숙했다. 유일한 출입객은 당시 조소앙선생의 비서인 김흥곤 군-.
전깃불도 없고 계단을 더듬거리며 오르내려야 하는 데다, 방엔 불기라곤 없었다. 햇별도 비치지 않았다. 식사는 옆골목에 있던 노동자식당에서 식권을사서 주고는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항상 들어앉아 공부만 하는 윤원구군이 식권을 관리했다.
식욕이 왕성할 때라 국밥 한 그릇은 숟갈질 두세번이면 모두 먹어치웠으나 윤군한테서 식권을 한꺼번에 두 장 이상 타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옷은 아침에 먼저 일어나 주워 입는 사람이 임자. 특히 온종일 걸어다니기 때문에 구멍나지 않은 양말이 없었고 그래서 구멍이 작게 뚫린것을 신으려고 매일 아침 양말 쟁탈전이 대단했다.
그즈음 나는 새 양말 한 켤레를 꼭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남의 집 문 앞에서 갈아신고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다시 헌 양말로 바꿔 신었다.
그처럼 웃지 못할 일들이 많았던 「아지트」 였으나 학련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밀실이기도 했다. 그 방에서 윤원구 군과 김린수 군이 수많은 성명서와 전단을 써냈다.
유일한 재산이던 등사판 한대로 넷이서 밤새워「프린트」한 것도 한 두번이 아니다.
약 한달 가량 지나서이든가. 이 비밀 「아지트」에 밉지 않은 침입자가 나타났다. 장익삼 군이었다. 평북 선천출신으로 보전대학중인 그는 38선이 그어져 하루아침에 혈혈단신이 되어버렸고 고학으로 학업을 계속했다. 이른 새벽에 뚝섬에 가서 오이와 채소를 사다가 평화시장에서 팔았다. 시장에서 아는 여학생을 만나면 채소바구니 째 놓아두고 줄행랑을 치곤 했다.
그는 한 벌뿐인 작업복 속에 항상 숟가락 한 개를 넣고 다니는 넉살좋은 친구였다.
그러나 그처럼 학생운동에 열성을 보인 친구도 드물었다. 내가 보전에서 좌익학생들을 제압하게된 것도 그 친구의 힘이 컸다. 나를 부를 땐 『털승아!』아니면 『니원당!』 (학련위원장의칭호) 이라고 할 만큼 억센 평안도 사투리를 썼다. 그때 변명이「도깨비」바로 그 친구가 용케도 우리의「아지트」를 급습(?)한 것이다.
마침 아무도 없을 때 올라와서 전가보도처럼 갖고 다니는 그 숟가락으로 젓쇠질을 해가지고 창문을 따고 들어왔다.
책상을 뒤지다가 식권을 발견하고 한 뭉치를 빼내가지고는 노동자식당에 가서 불고기까지 먹곤 나선 너털웃음만 웃는 것이었다. 그 날부터 식구가 한사람 늘게 된 것은 물론이다(그는 졸업 후 사업을 했고 월남을 다녀오다 대만에서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다) .
「피난민 합숙소」에서 삼선교 옆으로 옮긴 것은 그 해 6월쯤. 차차 그 「아지트」를 여러 사람이 알게돼 좌익「테러」도 염려던 터에 그 방을 알선해줄 만큼 나를 여러 모로 아껴주시고, 나 역시 그분의 인격과 박학다식에 심취했던 조소앙선생이 그 문중에서 돈을 거둬 삼선교 근처에 집을 마련하셨기 때문에 나도 그분을 따라가 그 집 정문앞에 하숙을 얻었다.
「피난민합숙소」는 당시 학련의 전위부대인 중등부핵심 「멤버」인 오홍석·양근춘·홍관식·김용말·이승철 「팀」에게 넘겨주었다.
오홍석·홍관식군 등이 뒷날 윤보선선생 댁의 문간채로 옮겨갈 때까지 썼으니까 아마 1년 남짓 그 방은 우리 학련의 비밀「아지트」였던 셈이다.
새로 옮긴 삼선교 근처 하숙집에는 윤원구·김린수·계훈제군 등「피난민합숙소」「팀」이 그대로 옮겨갔다.
그러니까 반탁학련의 총참모부라 할까, 기획실이 이동한 셈이다. 장익삼군은 그때쯤 이북학생들을 규합해서 「이북학생련맹」을 만들어, 여전히 숟가락 한 개를 넣고 다니며 동분서주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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