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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난민 대 중공 첩보전 15년|「달라이·라마」는 미CIA가 지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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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중공의 지배를 피해「달라이·라마」일행이 59년3월「티베트」에서 인도로 탈출할 때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그들의 안전탈출을 측면 지원해주었고 그 난민들 중의 일부가 CIA에 의해 훈련받은 후 CIA의 지휘아래 대 중공 첩보 및 파괴활동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달라이·라마」는 물론 이 첩보활동에 참가했던 수백명의「티베트·게릴라」들과의 수개월에 걸친 집요한 추적회견을 통해 그 동안 비밀에 싸였던「티베트」난민들과 CIA간의 관계에 대한 진상을 최초로 파헤쳐 보도한 근착「파·이스턴·이코너믹·리뷰」지에 의해 밝혀졌다. 이 기사를 요약해 소개한다. <편집자주>
세계의 지붕「티베트」와「히말라야」산록을 배경으로 철저한 보안조처가 된 채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15여년간「달라이·라마」세력을 이용해 비밀리에 공작해왔던 대 중공파괴 활동의 진상이 밝혀졌다.
CIA의 지휘아래「티베트」난민들의 대 중공기습 활동도 동서화해와 더불어 끝장난 대신 중공과 새로운 대립관계가 있는 인도가 이들을 후원하는 국가로 등장했다는 것이 아울러 밝혀져 흥미를 끈다.
미국이「티베트」와 최초로 접촉한 것은 42년12월 CIA의 전신인 전략연구소(OSS)요원을 통해「달라이·라마」에게 미국이 장개석군에 줄 무기의 공급로를 허용해 달라고 요구한 때였다.
「라마」정권은 앞서 영국의 비슷한 요구를 거부했던 것처럼 이를 거절했다.
그후 중공이 중국 전역을 석권하기 바로 직전인 49년8월 불안을 느낀「라마」정권이 미국인을 통해「트루먼」미국대통령에게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트루먼」은 이때「라마」의 요청에 부정도 긍정도 아닌 동정심만을 표했을 뿐이었다.
피차가 한번씩의 요청과 거절을 한 후 본격적인 미·서장 관계가 시작된 것은 57년부터였다.
50년에 중공군이「티베트」에 진주한 후「티베트」가 중공에 편입하는 대신 중공은 점차적인「티베트」의 사회개혁을 추진한다는 등의 중공·「티베트」간의 17개항의 조약이 51년 맺어졌다. 「달라이·라마」와 모택동간의 개인적 친교가 맺어지고 중공은 약속대로「티베트」의 제정일치의 기존질서를 한동안 그대로 방치했다.
그러나 55년 말 동부「티베트」의「리탕」에서 중공이 모든 지주들의 재산목록을 등록케 하고 조세를 징수하려 하자 잠정적 평화는 깨어지고 말았다.
5천여의 승려와 1백13개의 소사원을 관할하는「리탕」사원의 승려들이 이에 반발, 총을 들고 일어섰던 것이다.
그러나 수도「라사」의 귀족지배층들이 자기도취에 빠져 이들을 돌보지 않자「티베트」동서부의「콤파」지역에서 탈출한 거상「타시」가 미국과의 접촉을 개인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인도의「칼림퐁」에 있던「라마」의 형「걀로」를 통해 미CIA와 접촉했다. CIA는 중공에 관한 첩보활동에 애를 먹던 때라 선뜻 이들의 요구에 응해서 57년 초「티베트」저항 단체의 요원 6명을 태평양상의 한 섬에서 교육시켜 그해 겨울에 처음으로「티베트」내지로 공중 투하했다.
그들 중의 한 요원이「라사」에 침투, 집정관에게 대 중공무역 투쟁을 일으키면서 미국에 정식으로 원조를 청하라는 CIA의 지시를 전달했다. 집정관은『희망 없는 항전보다는 원폭을 투하하라』면서 거절했다.
이에 CIA는 그들이 훈련시킨「티베트」인 요원들에 의한 본격적인 주민봉기를 일방적으로 꾀하기에 이르렀다.
57년 가을에 CIA는「캄파」지역의「게릴라」요원들에게 무기를 처음으로 공중, 투입했다. 58년 초, 중공이「티베트」의 공산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달라이·라마」는 59년3월17일「라사」탈출을 결심했다. 「라마」일행은 탈출하면서 계속 CIA와 무선교신으로 탈출로를 열었다.
CIA는「네팔」로 탈출한 이들 난민들 중 일부를 미국의「콜러라도」주「해일」기지에서 비밀리에 첩보 요원으로 양성, 「티베트」에 공수 투하했다. 그러나 2년간이나 계속된 이 작전에서 거의 아무런 성과도 못 거둔 CIA는 61년「네팔」서부에 있는 천연의 요새「무스탕」계곡(표고 8천여m)에 비밀기지를 설치했다. 「네팔」정부도 이 비밀기지의 존재를 모를 정도로 첩첩 산골에 있어 완벽한 보안유지가 되었다. 수천 명의「티베트」난민들이 CIA요원의 지도를 받으면서 때때로「티베트」안의 중공군을 기습했다.
한번은 중공군의 차량을 기습, 중공의 대약진운동이 실패하고 있다는 놀랄만한 기밀문서를 노획하기도 했다.
62년 중공·인도 국경 분쟁이 났을 때도 인도는 자국에서 CIA의 조종아래「티베트」인들이 월경, 중공군을 기습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심지어 인도는 중공에 대해 인도 영토로 비행기를 띄우지 말라고 여러 번 항의했는데 실은 이 비행기들이 미국과 자유중국의 비밀항공기들이었다.
이 기지는 64년 폐쇄되었다. 인도가 사정을 알고「뉴델리」북부에 정식으로 기지설치를 허용했기 때문. 미CIA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대신 인도가 국경지방에「티베트」여단을 창설, 중·인 국경에 배치했다.
미국은 69년부터 동서화해 기운에 따라 이들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되었고 이에 앞서 자유중국은 그들대로 이 지역에 요원을 파견, 첩보활동을 하다가 65년부터는 장개석과 모택동의 묵계로 중단했었다.
이런 틈을 타 인도는 재빨리「무스탕」계곡에 잔존한「티베트」난민들의 주도권을 미국에서 뺏기 위해 친미파「티베트」인사들을 숙청하려고 시도했다. 미·인에 이용당한 이를 난민들은 그 동안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다가 74년 친미파 인사들이「네팔」정부에 투항해 버리고「무스탕」계곡에는「게릴라」가 사라졌다.
「티베트」난민들에 대한 CIA의 원조는「키신저」가 미 국무장관이 된 후 완전히 끊기고 대신 중공과 국경분쟁으로 대립관계에 있는 인도정부가 이들의 새로운 후원자로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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