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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1434) <제47화> 전국학련(46)|나의 학생운동 이철승|고당, "북한동포와 운명 같이 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고당과 남북제휴>
1945년 11월 중순 어느 날인가, 나는 계동 인촌댁엘 들렀다.
뒤뜰에 흰 고무신이 놓여있고 손님이 온 듯 했다. 문을 열자 낯선 손님이 계셨다.
망설이는 내게 「인촌」선생은 『이군, 들어오게나…』하시면서 한복에 깐깐한 평안도사투리를 쓰는 어른 한 분을 소개했다.
평양에서 고당 조만식선생을 모시고 조선민주당의 상무집행위원으로 계신 이종현씨였다.
홋날 자유당시절 이 박사밑에서 농림장관을 지낸 분이기도 했지만 전국학련 시절 나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이경호동지 (서울공대대표·재미)의 선친이기도 했다.
고당의 밀사격으로 서울에 와서 은밀히 남한인사들과 접촉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 이종현씨는 45년11월3일 조선민주당창당을 계기로 북한의 조선민주당과 남한의 한국민주당과의 협력방안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계셨다.
이종현선생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당시 소련의「치스차코프」는 「로마렝코」군정장관을 통해 북한의 적화공작을 다져나가고 있는데 그것의 최대 암적존재는 바로 고당이었다. 그러나 고당의 인기와 선망때문에 그들도 이른바 민주화를 내세우며 고당을 이용하고 있고 고당역시 이점을 역이용하여 북한동포를 적화의 마수속에서 사수하고 있다고 했다.
고당에대한 이승만박사의 기대도 마찬가지로 컸다.
이박사와 고당의 관계는 국내외에서 각기 독립투쟁을 해왔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면이 없었지만 간접적으로는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해방을 맞게되자 고당은 11월 중순 한근조씨를 통해 이박사와 첫 접촉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고당은 이종현씨를 통해 인촌과, 그리고 한근조씨를 통해 이박사와 손을 잡은 셈이다.
그 당시 김동원장로의 소개로 교암장에서 처음으로 이박사와 만난 한근조씨에게 이박사는 말했다. 『이건 우리끼리 얘기지만 나는 고당이 서울에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소. 내가 해외에서 40년을 머무르는 동안 악독한 일제의 치하에서 고국의 우리동포들이 죽어가는지 살아가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가끔 조만식선생의 항일투쟁 소식이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나에게 전해질 때 미덥고 고마운 적이 많았소. 이제 나라가 독립을 맞아 해나갈 일이 산적해 있잖소. 고당을 곧 상경하시게 하시오. 』 이 얘기는 한근조씨가 뒤에 내게 들려준 비화다. 이말 속에서도 고당에 대한 이박사의 기대는 역연히 나타났다.
그러나 고당은 『나는 북한 1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했다』는 각오를 나타냄으로써 이박사는 고당을 중심으로 한 북한 안에서의 반공투쟁을 관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46년 1월말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이 북한의 각 정당·사회단체가 제출한 찬탁서명의 연판장을 내놓게되자 미국 측의 입장은 적이 난처하게 됐다. 북한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강제로 조작된 연판장일 망정 그것이 전 북한인민의 의사인 양 물적 증거로 내놓음으로써 미국 측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박사는 46년 2월말께 당시 민주의원 의사담당비서인 김욱씨(민주의원은 2월14일 개원) 를 비밀리에 이북에 파견해 고당 등 민족진영 인사를 만나 반탁결의문에 서명을 받아 오도록 했다.
김욱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천신만고 끝에 평양에 도착했더니 이미 체포령이 내려졌더군요. 그래서 서문여상선생인 처를 통해 보화의원 원장선생과 접촉했지요. 그래서 그와 같이 나는 조수로 가장해서 고려「호텔」로 고당을 찾아가 만나 뵐 수 있었죠. 그러나 고당은 내가 갇혀있는 일은 세상이 다 아는 것 아닌가? 갇혀있는 사람이 반탁결의문을 작성해서 서울로 보냈다면 납득을 잘 안 할테니 이구영목사(조선민주당부위원장) 를 만나 나를 대신해서 서명해 달라고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당시 이목사는 이북은 물론 이남과 만주일대에까지 명성을 떨친 부홍목사였다. 그래서 김씨는 이목사를 찾아갔다.
이목사는 김욱씨의 자초지종이야기롤 듣고 조민당을 정식으로 대표해서 반탁결의문을 백지위임으로 각성, 서명해 주었고 또 소련군의 만행으로 비참하게 고생하고 있는 북한동포들의 고발을 그린 서신까지 이박사 앞으로 써 주었다.
김욱씨는 이렇게 해서 반탁서명서와 사신을 갖고 이박사에게 전달했다.
이박사는 이것을 미·소공위를 겨냥해서 신문에 공개함으로써 이북의 실정과 조작된 찬탁의 의사를 폭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이목사는 더 이상 북한에 살 수 없게됐다.
38선을 넘나드는 사람으로부터 이남의 신문을 우연히 얻어 읽은 이목사의 제자 임태경씨(정주)가 조민당의 반탁결의문이 크게 실린 것을 알고 스승의 안위를 걱정하게됐다. 『이거 큰일 났구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저놈들이 이 목사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테니 이대로 앉아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임씨는 그길로 초롱불을 밝혀들고 밤길을 재촉해서 이목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들고간 신문을 보여드리고 평양을 탈출할 것을 강권, 극적으로 그날밤을 넘기지않고 부랴부랴 월남했다. 그후 이목사는 이박사와 가까와져 국무총리서리를 지내는 등 인연을 맺게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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