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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1430)|전국자련<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창낭의 수완>1·18사건은 고 창낭 장택상선생이 미 군정하의 경기도 경찰부장으로 취임해서 첫 솜씨를 보인 사건.
고하 송진우선생이 조병옥박사를 미군정 경무부장에 추천하고 창낭 장택상선생 더러는 수도치안의 책임자인 경기도 경찰부장을 맡아달라고 권유했다.
이 제의를 받고 주저하다 고하가 한현우에게 살해되자 장택상선생은 살해 진상을 캐내고 치안을 바로잡겠다고 그 자리를 맡고 나선 터였다.
어떻든 1·18사건이 터지자 창낭은 그의 능수능란하고 민첩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선 새벽같이 삼청동에 있는 학병동맹의 「아지트」를 급습했다.
진두지휘를 한 것은 물론이다. 전날 밤 반탁시위군중을 습격한 그들은 경찰의 급습에도 무기로 저항했다.
경찰3명이 중상을 입었고 경찰의 응사로 학병동맹원 2명이 죽었다.
좌익은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폭력행위를 본격화했고 따라서 경찰로서도 좌익에 대한 규제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그 다음날(20일) 상오 10시께 무장경찰들이 뜻밖에도 우리 반탁학련본부를 포위하는 것이 아닌가.
서울역 앞 「세브란스」의전안에 있는 별관하나를 빌어 「반탁학련본부」로 사용한지 불과 보름만의 일.
학련간부들은 1·18사건의 부상자와 행방불명된 여학도(조소난양)에 대한 선후책을 논의 하고있었다.
학생들의 피해상황파악·문병대책·부모와 요로에 알리는일·가해자인 공산분자의 색출문제 등 손댈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트럭」을 타고 달려온 무장경관들은 사무실을 포위했다. 그리고는 학생간부들 뿐만 아니라 사무실에 와 있던 남녀학생들을 모두 강제로「트럭」에 끌어 올렸다. 죄목은 폭행 및 기물파괴, 그리고 치안문란죄 위반혐의.
그 날 연행된 학도들은 필자와 이동원 함종찬 서태원 김종순 박석규 김득신 김동흥 김기호 조한원등과 김상현 (인촌선생따님) 윤성선(윤치영선생따님) 김춘희 김봉화 최정애 주일옥 박죽희양등 모두 41명이나 됐다.
우리를 실은 「트럭」은 남대문을 거쳐 광화문·중앙청 앞의 경기도 경찰부(현치안본부)로 달렸다.
우리는 연행중의「트럭」위에서 『탁치반대』『자주독립만세』등 구호를 목이 찢어지라고 외쳤다.
경기도 경찰부에「트럭」이 도착하자 학생간부들은 수사과장노덕술의 지휘아래 형사실에서취조를 받았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장택상경찰부장이 우리가 있는 곳에 왔다.
나는 그에게 대들었다.
『왜? 우리를 끌어 옵니까? 그날 시위는 애국정열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일제치하에서 36년 동안 신음하다가 멸망의 문턱에서 기사회생한 우리민족이 또 다시 4개국의 속국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소련을 조국이라고 부르는 민족반역자들의 언동에 대한 국민의 원성을 학생들이 대변하다가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중상을 입고 입원해 있는 판에 습격한 자들이나 처단할 일이지 왜 무고한 우리를 잡아오는 것입니까?』그러자 장경찰부장(후에 수도경찰청장이 됨)은 말했다.『양측이 충돌했는데 치안책임자로서 어찌 좌익계만 잡을 수 있는가, 자네와 여학생들은 부상한 남녀학생들을 보살펴야 할 테니 먼저 나가게.』 이에 이르자 나는 『전원석방 시켜주지 않으면 나도 나갈 수 없습니다』고 대들었다.
그러자 창낭은 나를 따로 불러 다시 설득을 했다.
『이 사람아! 위원장인 자네를 무혐의로 해야 사건을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 아무소리 말고 어서 나가게.』 그제서야 나는 복안이 있는 듯 싶어 못 이긴 채 나왔다.
그 길로 본부에 들러 나는 잡혀가지 않은 각 학교대표 들을 소집하고 부형들의 모임을 만들어 사식을 넣어주도록 연락하는 한편 민족진영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석방운동을 벌였다.
죽첨장은 물론이고 특히 유석·인촌·이박사, 그리고 미군정장관실을 왔다 갔다했다.
그 결과 이박사는 윤치영씨를 통해 학병동맹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중상을 입은 함영훈을 비롯하여 부상한 학생들을 위문하도록 조치했다.
김구주석께서는 엄항섭 선전부장을 대동하고 「세브란스」병원까지 찾아 부상학생을 문병했다.
당시의 여론은 대충 세 가지로 나뉘었다. 극소수였지만 우리의 시위를 비난하는 쪽, 동기는 찬성하나 비합법행위만은 반대하는 사람, 그와 같은 사태는 박헌영일파가 자초한 것으로 애국심의 발로라고 지지하는 쪽 등.
그래서 우리는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점 ▲무기를 갖지 않은 평화적인 시위였다는 점 ▲단순히 반역분자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점 등을 국민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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