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발전적인 민족의 기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1945년의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참다운 의미에서 「행복」 이니, 「자유」니, 「주권」이니 하는 것들이 되살아 날 수 있
다고 생각하게 한 계기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해방」이 외세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며 민족의 독자적인 힘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히 민족사의 한 단계를 향한 희망에 찬 사건이었다.
일제하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이름」마저 바꾸도록 강요되었던 민족에게 있어서 해방은 「자기 존재의 회복」을 일깨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소망과 좌절, 자기 비하와 무력감이 팽배했던 한 시대의 증후를 극복함으로써 의롭지 못하고, 거짓에 찬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점이 마련 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 「희망에 찬 새로운 삶」은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다.
짧다면 짧은 한 세대의 경험은 매우 고되고 쓰라린 시련이었다.
최근엔 전쟁의 불안이 감돌고 위장 이민이니, 「달러」 의 해외 유출이니 하는 맹랑한 사회상도 노출되었다.
소비 시대의 퇴폐적 향락주의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금전 만능의 풍조가 사회에 가득 차고 전통적인 윤리의 틀, 가치와 권위가 손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비열하거나 불의한 방법으로라도 자기의 행복을 획득,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하는 식의 철면피가 되는 것이 항례가 되어 버렸다. 살기 위해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은 부귀라도 그 획득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마치 공동선인 것처럼 치장되어 유행한다.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이 불안 속에 떨며 주관 없이 부화뇌동하는데 익숙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약삭빠른 삶, 비굴한 영달에 맛을 붙인 사람들이 발호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일 때, 또 이들의 정당성이 용납될 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민의 권리나 민족의 정의가 추구되지 못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지향되지 못 할 때 그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하여 대범한 기자와 진취의 기상이 없는 국민들이 서로 헐뜯고, 미워하고, 울고 웃으며 기뻐하고 괴로워하기를 손바닥 뒤집듯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자기의 좁은 소견, 자기의 감정적인 호악 기준에 따라 좋고 싫음의 가름이 너무도 강파르게 되었다.
이편 아니면 저편, 백이 아니면 흑이 있을 뿐 그 밖의 실재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내 편이 아니면 반듯이 적이라고 생각하는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논리가 강요되는 것이 바람직할까.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 너무도 어렵고 고달프다고 편협한 생각의 당연함을 고집하여 자기를 비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운명을 사랑한다』고 참다운 삶을 포기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 민족이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침략자를 배격하는 투쟁을 계속해 왔음을 전한다.
또 불의와 부정에 대한 배격 정신은 우리 역사를 꿰뚫어 흐르는 생활 원리였다고도 한다.
그런만큼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이 땅에 키워가기 위해서 동포로서의 아량과 이해가 가득찬 사랑의 풍토를 일굴 민족적 의지가 무엇보다도 오늘에 요청된다고 하겠다. 고해에 빠졌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악해」를 만들려는 진지한 열의가 있어야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