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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우간다」의 의학교수 김충희 박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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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캄팔라=김동수특파원】외국생활이라곤 「우간다」에서 11년 보낸 것이 전부지만 한때 문학소녀적인 감상으로 자주 쓰이던 「코즈머폴리턴」, 「집시」의 비애가 물씬 풍겨온다.
겉으로 드러난 생활이야 잔잔하지만 김충희 박사(50)는 스스로 유랑인의 면모를 감추지 못한다.

<「마케레레」의대 안과주임>
굴종하고 체념하며 현실에 만족할 수 있었던들 서울을 뛰쳐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구한말 「뼈대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조류에 밀려 몰락하는 와중에서 스스로의 뜻 한번 펴보지 못했던 것이 못내 한스러울 뿐이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긍지」 때문에 시류에 편승하지도 못하고 타협하지도 못하며 그저 평범하게 날을 보내다 외국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고 자조한다.
다행스럽게 여기는게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피해를 주는 일 없이 살아온 생활이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는 일이다.
「캄팔라」시의 「마케레레」 의대 안과주임 교수인 김충희 박사에게 욕망이라면 자녀들만은 자기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길러주고 부부가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40대가 되도록 미련을 갖고있던 개인적 욕망은 덮어둔지 오래다.
한창 많을 때는 50명이 넘었던 「우간다」의 한국의사는 현재 7명, 김 박사는 이중 제1진으로 왔던 6명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국인의 「우간다」 진출사의 증인이다. 11년 동안 의료사업으로 돌아다니느라 자동차를 다섯 대나 갈았다.
막연히 미개한「아프리카」의 한 부분이라는 상식만을 가지고 왔다가 고통도 많이 겪었으나 이제는 이골이 났다고 할까 담당한 생활에 파묻혔다.
지금은 「우간다」 정부의 각료보다 봉급이 많은 VIP(중요인사) 대우를 받고 있지만 처음 왔을 때는 우리 나라의 「인턴」 대우만도 못한 푸대접을 받았다.
64년 처음 파견되어 올 때 「우간다」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한 보수는 물가가 싸고 「달러」값도 괜찮을 때라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시키는 일이 문제였다.
계약할 때 아무런 말도 없어 정작 취업하게 되면 전문의 대우를 해줄 줄 생각했던게 탈이었다. 그 자신 경찰병원서 안과전문의로 13년을 보내며 연세대 의대의 임상조교수를 지낸 경력이 있는 터라 시골병원에 가서 일반의 노릇을 하라는 말을 듣고는 아연했다. 냇과건 욋과건 가릴 것 없이 모두 맡으라는 이야기다. 당직이 걸린 날 밤은 급한 환자가 있을 때면 제왕절개수술까지 하라는 판이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우간다」를 거쳐간 80여명의 의사 중 자신의 전문분야만 가지고 취업한 사람은 없었다.

<전문분야 불인, 일반의 취급>
이는 영국식 의료제도를 그대로 사용하는 「우간다」의 제도를 전혀 모른데서 온 다툼이었다. 64년4월 6명의 의사가 22명의 가족과 함께 왔을 때 공항에서 대대적으로 받은 환영이라든가, 신문의 큼직한 보도로 흐뭇했던 기분은 사흘 뒤 곳곳의 벽지병원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담박 분노로 변했다.
당장 보따리를 꾸려 돌아가자는 의견까지 있었으나 「우간다」 보건성관리와 한국공관 직원들의 만류로 진정됐다.
수도인 「캄팔라」에 배치될 줄 알았다가 모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은 했으나 관청이건 실업계건 아직 영국인이 버티고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우간다」 사람들의 「프라이드」라든가 의욕이 대단하던 때였다.
외국인이라면 영국인을 비롯, 인도·「파기스탄」밖에 모르고 그들로부터 착취만 당해 오던 터라 한국인 의사들을 보는 일반의 눈은 우선 경계빛부터 띠었다.
처음 진료에 나섰을 때 부닥친 것이 이미 자리를 잡은 영국인들의 차가운 눈초리와 「우간다」 국민들의 의혹에 찬 눈초리였다. 김 박사는 「우간다」 제2의 도시인 「진자」시의 병원으로 배치됐다. 「베드」수가 4백여개에 의사만 40명이 되는 규모가 큰 병원이었다. 흑인의사는 단 2명에 원장은 「에이레」 사람이었다.
처음 도착하자 야간 당직도 없이 아무데나 마구 돌리길래 그저 병원상황을 익히기 위해 견학을 시키는 거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고 나더니 제왕절개를 해라, 변시체의 부검을 하라는 데는 화가 치밀었다. 당직날 그런 환자가 들어오면 영국인 의사를 불러내 시키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한두 번이지 참다 못한 영국인 의사가 화를 내며 자기가 수술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배우란다.

<수술·시체해부 등 맡겨 아연>
물론 백인의사들은 동양서 온 「노랭이」가 제가하면 얼마나 하랴 하며 「두고 보자」는 식으로 관찰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끝내 버텨 2년 계약기간 중 반년만 빼고 전문의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전문의 제도가 뚜렷하지 않은 영국인들이 못마땅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영국제도에 따르자면 의사는 우선 제왕절개, 염좌(장이 꾄 것)와 「디스프네아」(「디프테리아」로 인한 호흡 곤란한 환자의 후두부절개 수술)의 세 가지 수술은 기본적인 「테크닉」으로 익혀 두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의료제도 때문에 일 자체로 겪은 고통은 김 박사 자신의 솜씨로 이겨낼 수 있었지만 「우간다」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자기에게도 똑같이 적응되는데는 질색이었다. 그들은 한국인 의사들도 영국인과 한데 묶어 백인이라는 뜻으로 「무중구」라고 불렀다. 김 박사는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 「아시아」인이라고 했더니 인도인과 「파키스탄」사람들만이 「아시아」인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동부「아프리카」지역에서 마치 화상들처럼 세계를 움켜쥐고 있어 질시의 대상이 되던 터라 「아시아」사람이라고 하기도 거북해 「코리언」이라고 대답했다. 『너희들을 착취하러 온 백인도, 「아시아」사람도 아니고 도우러 온 「코리언」이다』고 일러주었다. 그랬더니 이들은 『그럼 당신은 「코리언·무중구」』, 즉 한국백인이라며 좀체 구별하러 들지 않았다. 이 「무중구」라는 인상을 씻어내리는데는 무척 많은 시일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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