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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행사에 참석하기보다 문화 즐기는 대통령 보고 싶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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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21면

지난주 짧은 외신으로 미국 코미디 감독 해럴드 래미스(사진)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대도 그가 배우로 출연한 ‘고스트 버스터스’(1984)나 연출작 ‘사랑의 블랙홀’(1993), ‘애널라이즈 디스’(1999) 같은 영화는 좋아하는 팬이 많을 거다. ‘사랑의 블랙홀’은 나도 늘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 영화로 손꼽는 작품이다. 유명한 평론가 로저 에버트도 별 네 개 만점을 주면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영화들’ 목록에 올려놓기도 했다.

컬처#: 정치인과 대중 문화

하지만 이 감독의 70~80년대 작품은 그다지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미국 중년들이 어린 시절 ‘추억의 코미디’로 꼽고, 미국 방송에서도 ‘가장 웃기는 영화 10편’ 중 하나로 들어가는 ‘내셔널 램푼의 휴가’ 같은 그의 히트작 대부분은 몸으로 웃기는 영화들이다. 로저 에버트의 만점 별점 역시 영화가 나온 뒤 10여 년이 훨씬 지나 “내가 그때 잘못 봤다”며 고쳐 썼던 평점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지극히 대중적인, 깔깔 웃게 만드는 코미디의 주인공이었다.

눈에 띈 건 이어 나온 오바마 대통령의 추모 메시지였다. 그는 “우리는 코미디 전설을 잃었다”로 시작해 “그의 영화는 단지 우리를 배가 아프도록 웃겨주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영화를 통해 ‘권위’에 질문을 던지고 우리 사회의 소외자와 약자들을 응원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해피엔딩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됐다. 오늘 그의 가족들과 함께, 그리고 그가 사회 전체의 깨달음을 받기를 희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의 명복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그의 영화가 소위 ‘찌질이’ 같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며, 그런 코미디가 가지는 사회·정치적 의미를 알고 있다는 뜻이며, 해피엔딩이란 것이 미국 사회의 희망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세련된 표현이며, 마지막 ‘사회 전체의 깨달음’ 부분은 심지어 그의 영화 ‘캐디색’에서 인용한 대사다. 물론 오바마의 진심인지 연설담당 비서가 쓴 말인지는 확인할 바 없지만, 적어도 이 세련된 추모사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영화에 대한 이해와, 존경과 추억과 애정이 절절하게 묻어 나온다. 대중문화에 대한 대접의 수준을 엿볼 수 있었던 부러운 모습이었다.

하필이면 다음날 ‘문화가 있는 날’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이 뮤지컬 ‘김종욱 찾기’를 관람했다는 소식은 어쩐지 상대적으로 촌스러워 보였다. 이미 10년 넘게 흥행 중인 이 뮤지컬을 관람하러 가서 미리 초청된 대학 신입생들에게 ‘입학 축하’ 메시지를 연설하는 이런 방식은 뮤지컬을 보러 간 거라기보다는 뮤지컬 무대에서 대통령 ‘행사’를 한 일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지난달 애니메이션 ‘넛잡’의 관람에는 소외계층 100여 명이 초청되어 대통령의 관람행사에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영화를 보고 뮤지컬을 보는 일은 안 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은 일이다. 혹시라도 유망작의 흥행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이미 히트한 작품이 뒤늦게 격려 받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문화융성’을 내건 정부 아닌가.

그러나 유명인을 통해 우리가 문화에 자극받는 것은 그의 ‘취향’을 닮고 싶어서다. 그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그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한 이유는 존경하는 사람의 취향을 따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대중들을 문화적으로 자극하려면 자신의 취향과 문화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 보시라. 굳이 요란스럽게 홍보하지 않아도 대중들은 따라올 것이다. 대통령의 휴가철 독서 목록, 유명인의 서재 목록이 공개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물론 박 대통령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패션 감각으로 부러움을 자극하긴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문화적 취향이 어떤 것인지, 어떤 작가와 어떤 영화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더한 것은 저런 ‘행사’ 같은 문화 관람에서는 문화인이나 문화예술에 대한 소박한 존경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런 행사에서 주인공이 그 작품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번 겨울올림픽 선수단 귀국 환영식에서도 그런 점이 지적됐지만, 문화예술인들이 가장 바라는 점은 정치인들이 제발 자신들을 들러리 세우지 말라는 점일 것이다. 문화 융성을 위해 정치인들이 대중들에게 문화적인 자극을 주는 것 역시 요란한 치하와 격려보다는 한 편의 영화와 뮤지컬을 조용히 관람하고,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진심으로 문화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 더 효과가 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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