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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련의 역할|프랑스 국제문제 연구소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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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다음은 한국전쟁에 관한「프랑스 국제문제 연구소 연구원이며 국립 정치대학 교수인「엘렌·카레르·당코스」여사의 논문『분규의 근원』과「필립·드비에」씨의『분쟁과 구주』를요 약한 것이다. 이 연구소 발행「프랑스 정치학」「리뷰」지의『국제분쟁한국(1950∼1952)』이라는 특집에서「당코스」여사는 소련의 한국전쟁개입 및 역할을 예리하게 추구했고「드비에」교수는 한국전쟁이 구주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편집자 주>
【파리=주섭일 특파원 중계】1950년 6월25일 북괴군의 남침은 분단된 한민족이 군사적으로 대결한 것으로 처음엔 국지전이라는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미국은 한국에 결정적인 전략상의 이해관계가 없었고 그들의 방위영역에서 한국을 제외한다고 선언했었다. 더우이 그들은 한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 아무 것도 보장 해줄 수 없다고 까지 나왔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즉각적인 원조 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미국의 그때까지의 불간섭 정책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미국정책이 이같이 급선회한 조치의 근거는 명확하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기존 균형을 파괴한 것은 소련이며 따라서 한국전쟁 도발의「이니셔티브」는 소련이 쥐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미국의 인식은 당시 미국 대외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소 대외팽창정책의 일환>
한국전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아시아」봉쇄정책의 확대에 불과하다. 이 같은 미국의 봉쇄정책은 소련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도처에서 적용돼 왔다.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책임은 미국에 있어서는 명백한 것이었으며 1956년까지 여기에 대한 의문은 제기된 바 없다.
그렇다면 당시 소련은 왜 신중성을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모험을 각오하게 됐는가.
먼저 소련이 일반적인 대외확장 계획을 갖고 있었다면 한국전쟁은 이 계획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 무관심을 선언하자 그곳의 힘의 공백을 소련이 자신의 힘으로 메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점을 열거했다.
소련은 다음에 행동하기로 계획했던「이란」으로부터 세계의 주목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한반도에서 행동을 취하는 양동 작전을 쏜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또 소련은「베를린」에서의 모든 기도가 연합군의 단결된 결의로 좌절되자 이를 한반도에서 보장받으려 할 수도 있었다.
소련은 또 당시 친 서방으로 기울기 시작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를 친소형으로 통일하고 이 통일된 한국으로 하여금 일본과 대결시키려 했을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한달 전에 소련은 중공과 원조협정을 체결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중-소 동맹은 두 나라의 공동확장주의라고 생각했다.
이 동맹에 따르면 두 나라는 책임을 공동 부담해야 하며 한국전쟁은 이 확장주의에 대한 서방측의 반응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 이후의 역사가들은 그후 배경과「모스크바」의 분규를 들어 한국전쟁에 중공과 소련이 연대했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했다.
중-소 분쟁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소련은 그의 우방과 어떤 합의를 이루는데 실패했다.
중공은 소련으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 중공은 아마도 자신이 결정과정에 참여치 않은 한국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렸을 것이다.
전쟁발발에 대한 또 하나의 가설은 전쟁 도발책임은 소련이 아니고 북괴에 있다는 점이다. 북괴는 국지전이라는 전제 아래 그의 단독결정으로 전쟁을 개시했다고 보는 가설이다.
이것은 강대국의 보호·통제아래 있는 소국이 단독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을 취했을 때 이어 그 배후의 강대국들이 이끌려 들어가는 분쟁의 최초의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소련은 북괴의 전쟁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원한다면 이를 중지시킬 능력도 있었다.
어쨌든 소련은 이 전쟁에 직접 군사적으로 개입치 않아 그의 무책임을 주장할 수 있었고 이는 후에「데탕트」정책에 집착하는 온건한 강대국으로서의「이미지」를 심는데 도움이 됐다.

<중-소 연대설에 반론도>
소련은 1946년「이란」에서 했던 것과 정반대의 작전을 한국에서 수행했다. 즉 소련은 북괴를 무장시키고 그의 전쟁 수행능력을 확인한 후 군대를 철수시켰던 것이다. 그후 남한과 싸워서 독립과 통일을 달성키 위해 달릴 주자는 바로 북괴였던 것이다.
소련군의 철수이후 미군도 남한에서 철수했다. 미군 철수후의 남한은 군사적으로 약세에 놓여 있었다. 한국전쟁 때 미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사멸됐을 것이고 북괴는 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북괴는 일반적으로 소련의 위성국으로 인정돼 있었다.
소련은 북한에서 철수할 때 북괴정권을 계속「컨트롤」하는 장치로「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고 전후 소련에서 북한으로 귀환한 한국인들에게 정권을 맡겼다.
소련이 북괴와 맺은 경제문화협정은 몽고나 중공과 맺은 것과 달리 일반적인 우호 및 상호원조 의무를 규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협조 관계는 괄목 할만 한 것이어서 46년부터 50년 말까지 5억 4천 6백만「달러」를 북괴에 제공했다. 이 때문에 북괴는 경제와 이를 바탕으로 한 군사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50년까지 북괴는 경제와 군사계획을 완전히「모스크바」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련의 경제원조가 북괴의 장비증강에 이용된 점은 소련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소련 무 책임론 자들은 한국전쟁이 시작 됐을 때 왜 소련이 한국문제 토의를 위한「유엔」안보리에 결석했는가 하는 점에 고의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려 했다.
소련은 사실 중공의「유엔」불 가입에 항의하기 위해 그해 1월부터 안보리 출석을「보이코트」해 왔던 것이다.
만일 소련이 안보리에 출석했더라면 북괴가 더욱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즉「유엔」안보리는 소련이 불참함으로써 북괴를 침략자로 규탄하고 38선 이북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명령했으며 마침내는 한반도에「유엔」의 개입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괴에 대해 불리했던 소련의 결석은 국지적 충돌로 사건을 처리하려고 한 소련이 끝까지 국지문제로 다루기를 희망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국지전 처리가 소의 입장>
소련의 안보리 결석은 그것대로 소련 자신에는 몇 가지 이익을 주었다.
소련은 미국이 한국을 방위하기 위해 참전했을 때 북괴에 대해 참전할 의무를 회피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미국에 대한 수세의 입장을 전환시킬 수 있었다.
즉 미국은 전쟁 초기단계에서 북괴군의 철수를 획득하기 위해 소련에 이를 요청한 반면「모스크바」는 이 요청에 대해 국제적인 처리로 부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단순한 내부문제로 조직적인 반대를 했던 것이다.
북괴가 전쟁에 신속한 승리를 하지 못하고 미국의 반격이 확대되었을 때 소련정책은 개입이 아니라 중재 적인 역할로 굴절했다.
북괴군이 한때 강한 위치에 있었을 때 소련의 최소한의 지원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북괴 측의 승리는 충분히 가능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수많은 관측통들이 명기한바 있다.
그러나 소련은 북괴에 대해 극소수의 몇 가지 장비만 보냈을 뿐이다.
소련은 직접 개입한 적이 없고「유엔」을 중심으로 중재에 나섰다.
소련은 이때 6월25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시도했었다.

<아리송한 중공참전 동기>
북괴군의 38선 월경은 소련으로 하여금 새로운 문제에 직면케 했다. 한반도의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뿐만 아니라 다음에는 북괴를 구출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막상 참전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중공이었다.
당시 제기 되었던 의문은 중공이 참전한 조건, 다시 말하면 중-소 관계에 대한 의문이었다.
아직 역사적 기록들은 중공을 참전으로 이끌었던 결정적인 영향이 무엇이었는지 명백히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소련에 있어서 군비경쟁의 가속화·독일의 재무장·세계 도처에서 미국 동맹체제의 가동 등의 계기가 되어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과정은 한국전쟁 발발 전에「베를린」에서 이미 시작됐던 것이었다.
한반도의 위기는 서방 동맹간의 모순을 표면화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소련에 대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공의 경우는 달랐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중공의「유엔」가입과 대미 접근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20년 동안 사회주의 진영의「리더」로서 군림해 왔다.
마지막으로 국지적「플랜」에 있어서 만일 한국전쟁이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한반도 통일 이념을 좌절 시켰다면 역시 이것은 자유주의적 미국의 보호 밑에 통일한다는 한국의 소망에 대해서도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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