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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브레이크 '스가 정일'이 흔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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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도쿄특파원

“아베 정권의 우경화가 점점 선명해진다. 역사 인식 등을 둘러싼 총리 측근들의 (강경) 발언이 이어지고 안전보장정책이 정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동안 브레이크 역할을 해온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 일본 지지(時事)통신이 보도한 기사의 첫 대목이다. ‘우경화’라는 단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한 게 이례적이다. 미국이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비난하자 아베 신조 총리의 보좌관이 “우리가 더 실망했다”고 헐뜯고, NHK경영위원회에 투입된 아베의 낙하산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인체실험”이라고 펄펄 뛰었다.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기 위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올 상반기 아베 정권의 최대 미션이다. 그동안 간절히 원했지만 주변국 눈치를 보느라 이를 악물고 참았던 ‘고노 담화 검증’ 방침이 일본 정부에서 흘러나왔던 시점이다. 그러니 대놓고 ‘우경화’라는 표현을 쓰더라도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긴 하다. 그래서 ‘우경화’보다 더 눈길을 끈 표현은 ‘스가의 한계’였다.

 스가 관방장관이 누군가. 아베 총리와 함께 일본 정부를 이끄는 사실상의 넘버2다. 아베 총리와 측근들이 저지른 사고를 뒤처리하는 위기관리 담당이기도 하다. 맡고 있는 역할은 ‘정권의 어머니’지만 일본 기자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스가 정일’이다. 스가 요시히데와 김정일을 합친 말로 독재권력을 휘두른 김정일처럼 스가도 총리 관저와 각료들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다는 뜻이다. 아베와 스가 두 사람의 관계는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는 2인3각이다. 총리 외할아버지와 외상 아버지를 둔 ‘아베 도련님’과 달리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스가는 철저한 자수성가형이다. 이런 차이점이 둘 사이를 더 끈끈하게 만들었다. 2012년 여름 “져도 좋으니 아베 신조라는 정치가를 국민에게 한번만 더 보여주자”며 주저하는 아베를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내보낸 이가 바로 스가다. 아베가 총리에 취임한 그해 12월 26일 밤 “이번 내각이 중간에 무너진다면 그건 바로 역사 인식 때문일 것”이라고 조언한 이도 스가다. 우익이 득실득실한 내각에서 망언이 안 나오게 입조심시키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지지통신의 보도는 그런 스가조차도 고삐 풀린 아베를 주저앉히기에 역부족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베는 스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말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했다. 또 아베의 압박이 물론 작용했겠지만 스가 스스로가 최근 “고노 담화를 검증하는 팀을 만들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베는 올여름을 목표로 개각을 준비 중이다. 아베 주변에선 “브레이크 역할을 해온 스가를 자민당 요직으로 돌려 ‘아베 색깔’ 강한 정책을 추진하는 일을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스가가 있어도 이 정도인데, 만약 그가 관저를 떠난다면 아베 정권이 얼마나 더 난폭해질지 걱정이다.

서승욱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