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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의 종횡고금<5>눈 속에 홀로 핀 고고함, 설중매 … 선비들 '난세의 희망'으로 은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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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이 계절, 이른 봄의 향훈(香薰)을 사람들에게 인상 깊게 전하는 꽃은 단연 매화다. 매서운 겨울의 끝에, 심지어 철늦은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에 선인들은 고결한 품격과 꿋꿋한 절개라는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매화는 선비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갖춘 꽃이었다. 그래서 당(唐)의 자연파 시인 맹호연(孟浩然)은 장안에 눈이 내리면 산속으로 매화를 찾아 나섰고 이러한 그의 취향이 담긴 ‘답설심매(踏雪尋梅)’는 동양화의 한 주제가 되었다.

 그뿐인가. 송(宋)의 은사 임포(林逋)는 호수의 섬 속에서 “매화 아내, 학 아들(梅妻鶴子)”과 더불어 평생을 살았고 퇴계(退溪)는 임종 직전에 다른 말은 없이 매화분(梅花盆)에 물을 주라고 당부했다. 무엇보다도 조선 말기의 화가 전기(田琦)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를 보라. 눈이 쌓인 산에 매화가 피어있고 산중의 초옥(草屋)에서 한 선비가 책을 읽고 있다. 그야말로 매화와 선비가 혼연일체가 된 경지다.

 물론 봄을 장식하는 꽃은 매화만이 아니다. 같은 속(屬)인 배꽃(梨花), 복사꽃(桃花), 살구꽃(杏花)도 있다. 그러나 붉은 색의 농담(濃淡)에 따라 꽃의 품격이 달라진다. 배꽃만 해도 고려 이조년(李兆年)의 시조에서처럼 “이화에 월백(月白)” 할 정도로 청초한 이미지를 유지하지만 붉은빛이 우세한 복사꽃에 이르면 ‘도화살(桃花煞)’이라는 말도 있듯이 색정을 상징하게 되고 급기야 짙붉은 살구꽃에 이르면 완전히 천격(賤格)으로 떨어진다. 당(唐) 두목(杜牧)이 “청명절에 비가 흩뿌리니, 길 가던 사람들 어이없어 하네. 술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淸明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라고 읊은 이후 살구꽃은 술집 혹은 술집 여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꽃 중에서 가장 높은 품격을 지닌 매화, 그중에서도 눈 속에 핀 매화 즉 설중매(雪中梅)는 난세의 희망 혹은 선지자 등을 암시하는 정치적 은유로 활용됐다. 가령 조선 중기의 문인 정시(鄭時)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밤새 눈이 석 자나 내리더니, 강촌의 길이 열리질 않네. 청노새는 주린 데다 병까지 들었으니, 어느 곳에서 갓 핀 매화를 찾을꼬(夜雪來三尺, 江村路不開. 靑驢飢又病, 何處得新梅).” 눈이 석 자나 쌓여 길이 막힌 것은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의미하고 갓 핀 매화는 그러한 절망 속에서의 희망을 암시한다.

 눈 속에 핀 매화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조선 개국 초 설중매(雪中梅)라는 명기가 있었다. 혁명이 성공하고 궁중에서 공신들의 잔치가 열렸는데 한 공신이 설중매에게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오늘은 동쪽 집에서 먹고 내일은 서쪽 집에서 자는(東家食, 西家宿) 네 신세가 어떠하냐?”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는 기생의 신세를 야유한 것이다. 그랬더니 설중매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예. 어제는 고려 왕조를 섬겼다가 오늘은 이씨 왕조를 섬기는 대감의 신세와 똑같지요.” 무안해진 공신은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못했다고 한다.

 엊그제, 눈 속에 핀 매화를 찾아 나섰다는 분들이 졸연(猝然)히 갈 길을 바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매화를 찾기는커녕 혹여 청명절에 살구꽃 핀 마을(杏花村)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설중매의 핀잔을 듣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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