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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했던 고대 남한-구주 교류|한·일 제휴 삼한 해로 답사에 거는 학계의 기대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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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질 연대로 말하여 제4기의 홍적세에 속하는 아득한 태고에는 일본열도는 한반도에 연결되어 대륙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으며 동해는 하나의 큰 내륙호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 해협 측 현해탄이 끊어지고 일본의 지형이 현재와 같은 섬나라로 고립된 것은 홍적세 후기에 이르러서부터의 일이었다고 지질 학자들이 밝히고 있다. 이 홍적세가 끝날 무렵부터 일본열도에 인간이 등장하였으며 그들이 남긴 구석기 유적들이 현재까지 여러 곳에서 확인된바 있으나 우리 나라 구석기 문화와의 관련성에 대하여서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 역사의 여명기를 맞아 구주 지역이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소위 미생 (야요이) 문화의 성립을 본 후부터의 일이다.
이 미생 문화의 출현에 앞서 일본에는 승문 (죠오몽) 문화라고 부르는 신석기시대 문화가 존재하였다. 우리 나라와 비교해서 말한다면 즐문 토기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해당되는 선사 문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난 71년 부산 동삼동의 즐문 문화 패총을 발굴하였을 때 그 상층에서 구주의 후기승문 토기와 똑같은 구연부 파편이 출토되어 일본 고고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케 하였다.
동삼동 패총의 연대는 그 최하층에서 채집한 목탄으로 C-41 측정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5천년전이라는 연대를 얻을 수 있었다.
미생 문화를 규정 짓는 가장 현저한 특징으로서는 농경 생활과 금속기의 사용을 개시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 농경 생활은 시초의 단계부터 벼농사를 수반하였다. 그런데 이 미생 문화의 출현은 대륙 문화의 구주 상륙을 기다려 발생하였다. 이 문화의 북 구주 발생설은 일본 학계에서 움직일 수 없는 정세로 확립되어 있으며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한사람도 없다. 그들이 사용한 석기들은 그 태반이 반월형석도·유구석부·태형합도석부·마제석족·석검 등과 같이 우리 나라 무문 토기 문화에서 전파된 연모들을 사용하였다.
보다 더 흥미를 느끼게 되는 사실은 이 「야요이」시대의 개막을 가져오게 한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문제이다. 제2차 대전 후 일본의 어떤 저명한 인류 학자가 다수의 미생 인골을 발굴하여 연구한 결과 그 골격상의 특징 중에 북한에서 발굴된 석기시대 인골과 유사한 점이 있음이 밝혀졌었다.
특히 그 신장은 현재의 남한 주민들의 신장과 거의 일치된다는 통계를 얻었는데 그후 일본 주민들의 키는 고분시대 (4∼6세기)에 이르러 다시 현재의 일본 사람들처럼 낮은 신장의 소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미생 문화의 성립 시기에 한국으로부터 다수의 이주민이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혼혈이 이루어졌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미생 시대 (BC 3세기∼AD 3세기)는 우리 나라로 말한다면 삼한시대와 병행되는 시기에 해당된다. 이때 남한과 구주 사이에는 교류가 활발하였다.
중국의 문헌에 의하면 서기 기원 전후께부터 북구주를 중심으로 하여 일본 각지에는 왜인들이 세운 다수의 부족 집단적 소국들이 분립된 상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유명한 존재가 노국과 사마대국이다. 노국은 서기 57년에 중국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광무제로부터 금인을 하사 받았다.
복강시에 인접하여 박다제 입구를 가로막고 위치한 지하도에서 발견된 「한위노국왕」금인은 이때의 유물로 간주되고 있다. 여왕 비미호에 의하여 통치된 사마대국은 맹주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고 서기 3세기에 여러번 위국에 조공한 바 있었으나 그 소재지에 대하여서는 기내 대화설 (즉 현재의 나량현)과 구주설이 대립되어 극심한 논쟁을 벌여놨으며 아직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사마대국의 위치가 모호한 까닭은 근본 사료인 삼국지위지동이전의 해로와 육지의 거리에 관한 기사가 요령이 없고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같은 위지동이전에 의하면 이때 우리 나라 남부 해안에서 크게 활동한 나라는 구사한국 즉 현재의 김해 지방이었다. 당시의 경제적 교류에서 제일 중요시된 물자는 변진에서 산출된 철의 원료였으며 그것을 공급받은 지역은 비단 삼한 왜뿐만 아니라 대방군에서도 교역해 갔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에 나타난 사실은 몇 해전에 동래 패총을 발굴하였을 때 제철지로 생각되는 구조가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고대의 남한과 구주와의 관계는 한족에서 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방 통행적인 관계로 그치지는 않았다. 근래에 이르러 김해와 대구지방에서 한국 청동 제품을 모방해서 제작된 일본 제품인 동검·동봉·동과들이 출토된 바 있으며 이들은 두 지역 사이에 있어서의 문학의 역류 현상을 명백히 해주는 고고학적 자료로서 특이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류 현상은 그 후 고분시대까지 간간이 계속되었던 것 같으며 골석제의 모자곡옥, 녹각제도자병, 통형동기와 같은 일본 산품이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화의 흐름에 있어서의 대세는 어디까지나 한국에서 일본을 향하여 흐르고 있었으며 그것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구주 지방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5세기 후반에 대륙 계통의 횡혈식 석실 고분이 북구주에서 먼저 출현한 것이라든가, 그 후 6세기에 이르러 고구려 벽화 고분의 영향 하에 축조된 장식 고분들이 주로 북구주를 중심으로 해서 분포한다는 사실들은 그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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